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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終) <10> 두려움 없애주는 보살 당당한 용기 샘솟

by 가릉빙가 2009. 6. 20.

★~ 관세음보살 보문품 (終) <10> 두려움 없애주는 보살 당당한 용기 샘솟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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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애주는 보살

당당한 용기 샘솟게 해



무진의야, 이 관세음보살은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여 갖가지 형상으로 여러 국토에 노니시며, 중생을 해탈케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들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공양할지니라. 이 관세음보살마하살이 두렵고 급한 환난 가운데 능히 두려움을 없애주므로, 이 사바세계에서는 모두 ‘두려움을 없애주는 이’라고 부르니라.


관세음보살은 부처님·벽지불·성문·범천왕·제석천·자재천·대자재천·천대장군·비사문·소왕(小王)·장자·거사·관리·바라문·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장자의 부인·거사의 부인·관리의 부인·바라문의 부인·소년·소녀·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집금강신이라는 33가지 몸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33응신(應身)입니다.

응신은 누군가의 요청에 응답하여 나타나는 몸을 말합니다. 온전히 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몸입니다. 이 응신은 이제 우리 중 누군가가 부르기만 하면 즉시 나타납니다.

내가 아무리 천한 일을 하여도 나만큼이나 천한 모습의 그 분이 곁에 계십니다. 내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꼭 나만큼 바보 같은 이가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에게 자신도 진흙투성이이면서 ‘자, 어서 밟고 올라가’라며 오히려 널찍한 등을 내미십니다.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보다 더 고독하면서도 따뜻한 미소와 배려를 잃지 않는 이가 내 옆에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탐욕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씻지 못할 죄를 저질렀어도 내 옆에는 나보다 더 극악하여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지어놓고 나의 죄까지도 짊어지려는 듯 겁에 질려 떨면서 참회의 눈물을 쏟는 이가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당신 곁에 나타납니다. 그러니 불안하면 그 불안이 관세음보살이라 생각하십시오. 외로우면 그 외로움이, 두려우면 그 두려움이, 우쭐해지면 그 교만심이, 행복하면 그 행복이 관세음보살이라 생각하십시오.

이쯤 되면 무서울 것이 없어집니다. 키 작고 힘이 없다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우리 형한테 이를거야, 너흰 이제 죽었어”라며 으름장을 놓는 꼬마처럼, 태산보다 높은 번뇌와 무지의 마라 앞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펼쳐도 좋습니다. 지레 겁부터 먹고 쪼그라들었던 우리에게 가장 든든한 ‘배경’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집이 생겼고 기댈 언덕이 생겼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내가 예전보다는 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야 합니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 분을 섬기는 일이요, 구원을 예약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에 두루 나타나셔서
넓고도 큰 소망의 힘으로
크나큰 자비를 베푸시고
온갖 고난에서 구해주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南無 普門示現 願力弘深 大慈大悲 救苦救難 觀世音菩薩…)

관세음보살을 끊임없이 되뇌는 정근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쉬지 않고 힘차게 정근하다보면 어떤 일에서도 비굴해지거나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용기가 샘솟습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두려움을 없애 주는 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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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양 법보시는
부처님 말씀 받드는 것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관세음보살을 공양하겠나이다.” 하고, 목에 걸었던 백천 냥이나 되는 보배 구슬과 영락을 끌러 받들어 올리며 또 여쭈었다. “어지신 이여, 법으로써 드리는 이 보배 구슬과 영락을 받아 주옵소서.” 그때 관세음보살이 이를 받지 않거늘 무진의는 다시 관세음보살께 여쭈었다.

“어지신 이여,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 영락을 받아 주옵소서.”

만약 당신과 제가 영원히 중생으로만 살아갈 팔자라면 관세음보살은 아마 절대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을 것입니다. 손 내밀어봤자 구제불능인데 뭐 하러 힘들여 그런 고생을 하겠습니까?

관세음보살이 그렇게 분주하게 몸을 바꿔가면서 중생들의 부름에 응하는 까닭이 뭐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크나큰 능력을 지닌 보살들을 좌우에 거느리는 부처라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몰랐을 때는 중생이기에 품을 수밖에 없었던 한계와 절망이 우리를 영원히 중생으로만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신과 나는 이 세상에 가장 든든한 배경(관세음보살)을 둔 절대가치를 지닌 존재였던 것입니다.

관세음보살과의 만남은 우리 자신에게 그런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깨닫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깨달은 무진의보살은 크나큰 감동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값비싼 보석들을 끌러서 관세음보살에게 바쳤습니다.

무진의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물로써 부처님을 공양하지 말라. 여래의 법신은 재물의 보시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법 보시로만 부처님께 공양하라.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법의 보시이며, 이것이 가장 훌륭한 법 보시이다.”(『보운경』)

돈(재물)으로 뭐든 쉽게 해결하려는 현대인의 속성을 꿰뚫어보고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만 같아 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데 무진의보살은 무슨 마음에서 재물, 그것도 비싼 보석들을 올리는 것일까요?

무진의보살의 다음 한 마디 말은 이렇습니다.
“법으로써 드리는 이 보석들을 받아주십시오.”
그가 올린 보석은 우리가 평생을 걸고 찾아다니는 재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천태 지의대사도 좥관음의소좦에서 여기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해석에서는 무진의보살이 법을 존중하는 까닭에 재물을 보시한 것(重法施)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때의 재물은 법과 통하므로 무진의보살의 이 보시는 여법시(如法施)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보살의 가르침과 구제의 능력을 존중하여서 올린 보시물이 아니라 보석 그 자체가 진리요, 자신에게 있던 진리를 바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지의대사는 무진의보살의 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은 중도(中道)라고 하는 하나의 진실한 이치를 상징한다. 집착 없는 법문으로 실상을 장엄하고 있는 것이 마치 목걸이가 목에 걸려 있는 것과 같음을 나타낸 것이다. ‘끌렀다’는 말은 보살이 항상 버리는 수행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서원과 수행의 공덕에서부터 부처님의 지혜와 보리와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의지하지 않는 까닭에 끌렀다(解)라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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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의 보살이 바친 보석은‘진리’
다시 중생에게 돌아가야‘회향’

 

그때 부처님께서 관세음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이 무진의보살과 사부대중과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들을 불쌍히 여겨 그 영락을 받으라.” 곧 관세음보살이 사부대중과 하늘 용과 그리고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 영락을 받으시더니, 둘로 나누어 한 몫은 석가모니불께 바치고 남은 한 몫은 다보부처님의 탑에 바쳤다 “무진의야,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이 자유스러운 신통력을 가지고 사바세계에 노니느니라.”

부처님과 무진의보살이 관세음보살에 대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우리의 주인공은 곁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성품이 없어 텅 비었음(空)을 누구보다도 환히 깨달은 관세음보살이었기에 자신을 찬탄하는 무진의보살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한없는 찬탄과 숭배조차도 텅 빈 것이라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올리는 무진의보살의 그 아름다운 보석을 말없이 거절하였던 것이지요.

좥보문품좦이 『묘법연화경』의 한 부분이라는 앞에서의 설명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묘법연화경』은 우리 같은 중생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있으며 그런 사실을 일깨워주고 보여주기 위해 부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관세음보살이 그토록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중생들을 구제하려고만 애쓰는 것은 바로 이런 법화경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중생의 입장에서야 관세음보살 덕분에 자신의 가치를 알아차리고 괴로움을 벗어나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었으니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려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관세음보살의 입장에서는 그저 모든 것이 본래 놓여 있어야 할 자리를 재확인시켜주었을 뿐이니 새삼 자신이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무진의보살이 값비싼 보석을 제 몸에서 끌러 공손히 받들어 올리지만 극구 사양한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권유로 두 손을 내밀어 받을 때 관세음보살에게는 ‘이것은 비싼 보석’이라는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은혜 갚으려고 준다’는 생각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저 이 소중하고 간절한 마음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석을 받자마자 둘로 나누어 부처님과 탑에 바쳤던 것입니다.

뜬금없이 웬 탑이냐구요? 그렇다면 『묘법연화경』의 견보탑품(見寶塔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석가모니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에서 탑 하나가 저절로 솟아났는데 그 속에는 다보부처님이 들어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께서 그 탑을 여시자 다보부처님은 자신의 자리를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반 양보하셨습니다. 석가모니는 그 탑 속에서 법화경의 나머지 부분을 설법하셨고 다보부처님은 곁에서 고요히 귀 기울이셨습니다. 다보부처님의 출현은 『묘법연화경』의 가치를 더욱 높여줍니다. 왜냐하면 이 분은 법화경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경이 설해지는 어느 곳 어느 때에라도 나타나시겠다며 서원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좥보문품좦을 설하시기 전에 이미 다보부처님은 탑만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다보부처님의 탑에 올렸다고 말한 것이지요.
무진의보살이 바친 보석은 ‘진리’였습니다. 그 진리는 관세음보살의 손을 거쳐 석가모니와 다보부처님에게 바쳐졌습니다. 그 진리는 다시 중생들에게 뿌려질 것입니다. 이것이 회향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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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가르침 체현은 법을 묻는 사람 몫

그때 지지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이 이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자유로운 업과 널리 보이고 나타내는 신통력을 듣는다면, 그 사람의 공덕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좥보문품좦을 설하실 때 대중 가운데 8만4천 중생이 모두 비할 바 없이 평등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어느 덧 좥보문품좦의 마지막에 도착했습니다.
중생을 향한 관세음보살의 일, 그리고 관세음보살의 자유자재한 능력을 듣기만 하여도 그 사람은 한없는 행복과 이익을 얻으리라는 지지보살의 감탄을 마지막으로 좥보문품좦 법회는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지지보살이 이런 말씀을 올리기 바로 전에 무진의보살과 부처님 간에는 다시 한번 길고 긴 대화가 오갑니다. 그 대화는 리듬을 갖춘 시로 이어지고 있는데 대체로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기에 저는 지면상 생략하였습니다. 대승 경전에서는 거의 전부가 ‘그 자리에 있던 00명의 대중들이 깨달음을 이루었다’라든가 ‘보리심을 내었다’라는 표현이 마지막에 자리합니다.

종교나 사상, 학문의 세계에서는 스승과 뛰어난 제자 한 사람 사이에 비밀리에 진리의 핵심이 전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이가 듣지 못하게 가까이 다가가서 진리를 전하면 그것을 전수받은 제자는 스승의 인정을 받은, 대중의 차세대 정신적인 스승으로 떠오릅니다. 인도의 종교철학(우파니샤드)도 그러하고, 선가에서 진리를 전하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어보면 대체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그 자리에서 모두가 제각각의 수준에 적합한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법을 감추어두지도 않고 한 사람에게만 비밀리에 전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백 퍼센트 이해하고 제 것으로 체현하든지 다만 일 퍼센트만 이해하든지 그것은 오로지 법을 듣는 그 사람의 몫입니다.

좥보문품좦의 설법을 듣자 수많은 이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고 하는데, 대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리’를 설명하자면, ‘보리’는 ‘눈을 뜨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칠흑 같이 깜깜한 황야에 어떤 이가 횃불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자기 옆에 누가 살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며 지내오던 어둠 속의 존재들은 빛을 얻어 눈앞이 밝아졌습니다. 빛을 얻는 순간 여태까지는 몰랐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환히 보게 된 것이지요. 세상에는 자기 혼자만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었는데 빛을 얻어서 눈을 뜨고 보니 세상에는 자신만 있었던 것이 아니요, 자기와 똑같은 이들이 셀 수 없이 존재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둠 속에서 자신은 쓸모없는 인간이요, 볼품없는 존재일거라 생각하며 탄식 속에서 지내왔었는데 밝은 빛 속에서 자신을 보자니 참으로 기품 있고 우아하고 힘이 넘치는 존재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대반열반경』) 눈을 떴다는 말은 이렇게 밝게 제대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보리, 즉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절묘한 구절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리’라는 말 앞에 ‘아뇩다라삼먁삼-’이라는 길고 아리송한 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이라는 뜻입니다. 완벽하여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의 경지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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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괴로움을 겪을 때 신음하거나 살려 달라 외치면 그 소리를 듣고 즉시 자비로운 구제의 손길을 취하기에 관세음이라고 이름합니다.
그러니 자연재해를 당하거나 어둔 밤길을 걷는다거나 법을 어겨 묶이거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 지경에 놓이거든 큰 소리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치십시오.
시도 때도 없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차오를 때면 그 번뇌의 마음자리에다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를 올려놓으십시오.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그 바라는 마음만큼이나 간절하게 관세음보살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어떨 때에 관세음보살을 기도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지장보살기도가 더 영험이 있을 것 같다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님 한분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절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숱한 보살마하살에게 의지하고 기도하는 효과를 냅니다.

「보문품」이라는 제목에서 ‘문(門)’은 바로 한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을 말합니다. 문을 연다는 것은 그 공간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문을 닫는다는 것은 그 공간에서 마감한다는 뜻입니다. 현관문을 열면 집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고, 문을 닫는다는 것은 집에 완전히 들어갔다거나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그 집에서 나왔다는 뜻이지요. 문이라는 말은 이렇게 모든 경지와 수준의 경계를 의미합니다. 가장 높게는 부처님의 경지로부터 낮게는 도깨비나 곤충들에 이르기까지 관세음보살이 활약하는 세계는 무한합니다. 게다가 그런 경지를 자유롭게 넘나들려면 그 경지에 적합한 수준이 스스로에게도 갖추어져 있어야 하겠지요. 문은 그래서 법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보(普)’라는 말은 두루 한다는 뜻입니다. 한 곳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세상 천지 모든 생명체에게도 그 힘이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어제는 부처의 경지에서 매우 어려운 설법을 하다가, 오늘은 세상에 태어나서 착한 일은 한번도 한 적 없는 이를 상대로 법을 설하는 능력입니다. 관세음보살 자신에게 편견이나 애착이 있다면 불가능할 것이고, 관세음보살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면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힘도 없고 지혜도 없어서 관세음보살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하지만 이분에게는 처음부터 ‘저 사람은 무지한 중생이니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어리석고 사악한 중생이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란 것도 없고 그 죄악에서 벗어난다는 것도 없는 법입니다. 이런 이치에 밝지 못한 이들이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는 조화에 관세음보살은 그저 허공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응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한번 중생은 영원한 중생’이라는 생각은 거두어 주십시오. 이 생각을 거두는 순간 우리는 이미 관세음보살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봄비는 한 번 내릴 때마다 대지의 온도가 1도씩 올라가고 가을비는 한번 내릴 때마다 1도씩 내려간다던 기상캐스터의 말이 떠오릅니다.

50회에 걸쳐 들려드린 저의 이야기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향한 여러분의 열정을 1도씩 올렸을지 아니면 1도씩 내렸을지 참 궁금합니다.
하지만 저는 무조건 여러분에게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계셨기에 저는 「보문품」을 1년 동안 줄기차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1년은 억겁에 걸친 윤회의 난폭한 물결 속에서 발견해낸 섬이었습니다. 저는 그 섬에 올라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러했듯 여러분에게도 그런 시간이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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