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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06> 분노가 날때 자비심을 내면 ~★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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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를 벗고 청정해지리라

 

여하튼 우리는 버럭 화를 내고 봅니다. 화를 내는 동안 내 마음에는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과 악의만이 가득 차 오릅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켰고 내 것을 빼앗았다고 하여 증오를 품고 있으면 증오는 없어지지 않는다.”(『법구경』) 그러한 증오와 적대감은 나의 입을 지배하여 못하는 말이 없게 만들고, 나의 눈을 지배하여 부모와 자식들도 보이지 않게 하여 급기야 그들의 목숨까지도 빼앗게 만듭니다.

분노가 무서운 이유는 이렇게 다른 이를 향해 독한 마음을 품게 만든다는 데에 있습니다.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전 곳곳에서 일러주십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자심관(慈心觀)으로 다스려야 한다.”(『정법념처경』)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라. 그러나 원한의 마음은 불과 같으니 서둘러 없애야 한다.”(『보살본연경』) “그리하면 분노라는 번뇌가 풀어지고 능히 자심(慈心)을 닦아서 번뇌의 때를 여의고 청정해질 수 있다.”(『달마다라선경』) “성내는 마음을 버려라. 자비가 능히 그것을 다스린다.”(『정법념처경』)

자(慈)는 maitr 즉 우정(friendship)이라는 뜻입니다. 비(悲)는 karu 즉 슬픔인데 남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인양 슬퍼하는 것입니다. 이 두 글자의 풀이를 곰곰 생각해보면 그 동안 별다른 생각 없이 써왔던 대자대비라는 말이 새록새록 깊은 감동을 안겨줍니다.

우정을 뜻한다는 ‘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따뜻한 마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상하관계도 없습니다. 사회에 나와서 손익을 따지며 사귄 사람과는 우정이란 말을 쉽게 쓰지 않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상대방을 나의 또다른 분신인양 여기며 지내온 관계에게만 우정이란 말은 적용됩니다.

이런 친구라면 상대방이 슬픈 일을 당하였을 때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슬퍼할 것입니다. 내 일처럼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비통함에 젖어들 것입니다. 이것이 ‘비’입니다. 그토록 거룩하고 존귀하여 감히 얼굴도 쳐다볼 수 없었던 불보살님들.

이 분들이 이 어리석은 중생인 나를 바라본 눈길에는 바로 이런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한 푼 던져주고 어서 문 밖으로 내보내야 할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버선발로 달려나와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쥐고 반기는 당신의 진정한 벗으로 나를 대하셨던 것입니다. 초라하고 남루한 나를 당신의 고대광실로 데리고 들어가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그런 분이 바로 불보살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좥보문품좦에서는 “혹 성내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그 마음을 여일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능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부드러운 음성은 더러움을 여이었으므로 눈, 귀, 코, 혀, 몸, 의지와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두루 원만하여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분노와 원한이 많은 중생에게서 온갖 분노를 버리게 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친구(慈)는 바로 관세음보살님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노로 인하여 초췌해진 나의 형색에 목놓아 울어줄(悲) 이런 친구가 곁에 있는데도 전혀 생각해내지 못한 채 분노의 불길에 내 몸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또다시 내 마음은 원망과 억울함이 마구 뒤섞여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으려 합니다. 나는 이제 염주를 꺼내들고 108배를 올리며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나무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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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를 알 때 악업 끊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둑어둑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뱀 한 마리가 또아리를 튼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뱀이다!”

그는 기겁을 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그 길을 지나가던 그는 자신을 그토록 놀라게 했던 것이 뱀이 아니라 밧줄이었음을 알고서 실소를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밧줄을 밧줄인 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뱀이라 착각하였던 데에 기인합니다. 한번 일으킨 착각은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 중생들은 영원히 밧줄인 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섯 갈래를 맴돌게 됩니다. 어쩌다 “아, 저건 뱀이 아니라 밧줄이었구나!”라고 눈치를 채는 일도 있겠지만 이내 뱀이라 보아왔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착각하며 지내왔던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합니다. 또 그게 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어리석음이란 이렇게 진실한 것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은 어리석음이다, 무명이다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으면서도 정작 ‘무엇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지’에 대해서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좥보문품좦에서는 어리석음이 치열할 때 관세음보살을 지극하게 생각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럼 이제 어리석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가장 먼저,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찾아오고 악한 일을 하면 괴로운 결과가 찾아온다는 이치를 모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바로 인과의 도리를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몸과 입과 뜻으로 악행을 하면 그것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잡아함 자호경』) 그러기에 현명한 사람은 악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악한 일을 저질렀다면 마치 불에라도 대인 듯 화들짝 놀라며 물러서서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러니까 못된 짓을 저지른 자는 결국 자기를 아끼고 보호할 줄 모르는 자이니 ‘바보’임에 틀림없습니다.

인과의 도리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어리석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악한 일을 하면 괴로운 결과가 찾아온다고 하셨지만 정작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평생 남을 괴롭히며 살아온 사람이 더 부유하고 무병장수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못된 짓을 해놓고도 “억울하면 고소해!”라며 되려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그 마저도 관두어 버립니다. 선량하고 어질며 겸손한 사람은 사회의 약자로 쳐지고 맙니다. 이쯤 되면 이 세상에는 착한 일 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남 먼저 챙겨주느라 제 것 챙길 사이 없어 빈손이 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손가락질합니다.

“에그, 저런 바보천치!”

그런데 진짜 바보는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인과응보의 이치가 이번 한 생에서만 끝난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목숨이라는 것이 그저 일회성이려니 생각하면서 다음 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행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동안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꿀처럼 달게 여긴다. 그러나 악행이 마침내 결과를 이끌어 올 때 그들은 크나큰 고통을 겪는다.”(『법구경』)

악행은 ‘잿속에 묻혀 있는 숯불처럼’ 끝내 그 사람을 따라올 것입니다.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라도(『중아함 수법경』). 착한 일에 대한 과보도 그러하니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 반드시 즐거운 과보는 찾아오고 맙니다.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걸친 업의 이치를 모르는 것을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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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 멸하고 바른 생각에 이른다

 

업인과보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살림살이를 풀어놓고서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세계[世間]의 원리를 설명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나고 죽는 세상을 벗어난 진리의 세계도 있습니다. 출세간(出世間)이라 부르는 것인데 출세간의 이치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야말로 진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세간의 이치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나’라는 것을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고요한 숲 속에서 선정에 들어계시는 부처님 곁으로 젊은이 한 무리가 몰려왔습니다.

“성자시여, 혹시 이리로 젊은 여자 한 명이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남녀가 짝을 이루어 놀러 나왔다가 그 중에 한 여자가 일행들 몰래 그들의 귀중품을 챙겨 달아났던 것입니다. 뒤늦게 여자를 찾아 혈안이 되어서 온종일 숲을 헤매다 마침내 부처님 앞으로까지 온 젊은이들에게 부처님은 조용히 되물으셨습니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일과 자기 자신을 찾는 일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사분율』)

놀 때에는 놀이에 정신이 팔리고, 그 다음엔 보물을 챙겨 달아난 여자 찾느라 정신이 팔린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따끔한 한 마디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평생 우리는 무엇에 정신을 쏟으면서 지내는 것일까요? 젊어서는 명예와 부를 찾아, 그리고 세상의 환락거리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나이 들면 자식들 생각이 온 마음을 지배하고 또 그러다 저승사자가 손짓하면 하던 일 그냥 고스란히 내버려두고 황망하게 따라나서기 바쁜 사람들…. 당신과 나의 지금의 모습이요, 미래의 모습입니다.

부처님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바로 그 ‘나’에 대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나를 분석해가다 하나씩 깨닫게 되는 법칙들….
무상한 나라는 것도 알고 보니 인연화합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져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생명체는 저 홀로 우뚝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서로 의지해[緣] 생겨난다는 것[起], 그런 존재 속에서 ‘나’라고 주장하거나 ‘나’만의 고유한 성품이라 주장할만한 것은 있지 않다는[無自性] 것….

이런 법칙들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나’에 대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법칙들을 진리라고 말하며 이러한 진리를 밝게 보는 것을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진리에 어두운 것을 어리석음이라 하겠지요.

이런 이치에 밝지 못한 중생들은 있다, 없다, 내 것이다, 내 것 아니다, 살았다, 죽었다라는 견해에 치우치게 되고 그 결과 살면 영원히 사는 양, 죽으면 영원히 없어지는 양 극단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몰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경전에서는 탐진치 삼독 가운데 어리석음을 그릇된 견해[邪見]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힌[癡] 이들이 법다운 생활을 할 리가 없습니다. 만 원 어치 일을 하고 백만 원의 결과를 바랄 것이요[貪], 바라던 결과가 따라주지 않으면 마음 속에 분노를 품는 것입니다[瞋].

『보문품』에서는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오를 때 관세음보살을 지극정성으로 생각하라고 일러줍니다. 어찌 보면 이 말은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범부인 한에는 죽을 때까지 관세음보살을 가슴에 새겨두라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관세음보살을 지극히 생각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바르게 생각한다[正念]’는 뜻이라는 지의대사의 해석도 깊이 음미해볼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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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 간절히 예경하라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옵니다.

우리 동네 상가에서 만난 한 보살님의 말이 자꾸 떠올라서요. 이 분은 신심 하나는 참 대단한 불자입니다. 이전부터 정신세계와 기 수련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그에 따른 수행도 열심히 한 데다 불자가 되고 나서는 큰스님 설법하는 날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그리고 관음재일 같은 날에는 아예 가게문을 닫아걸고 절에 가는 열성신자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108배에는 아주 서툽니다. 몸도 약하니 더 그럴 터이지요. 평소 이 보살님은 “난 절 못하겠더라. 108배도 겨우 하는데 3000배 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이라고 말하거나 심지어는 “습이 배어 있지 않아서 절은 못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보살님의 딸이 올해 수능시험을 보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수험생의 어머니인 ‘죄’로 이 보살님 역시 차디찬 법당에 밤을 새며 수도 없이 엎드렸다 일어서는 고행을 감당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요.

“거참 희한하데…. 내 자식 일이 달려 있으니 700배 800배는 거뜬하게 채워지던 걸….”

그토록 간절히 소원을 빌었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기가 막히던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런 말을 저에게 하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보살님의 얼굴표정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보살님의 하룻밤 경험담이 참 솔직하지 않습니까?

그 전에는 온갖 이유가 앞서고 논리가 지배했기에 엎드려 간절히 절을 할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빌어야 할 소망이 가슴에 담기는 순간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큰 소원을 가득 담은 납작한 접시가 되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제가 난데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바로 오늘 읽어갈 『보문품』의 내용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만일 어떤 여인이 아들 낳기를 원하여 관세음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곧 복덕과 지혜가 있는 아들을 낳게 되고, 만일 딸 낳기를 원한다면 곧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양을 갖춘 딸을 낳게 되리니, 덕의 근본을 잘 심었으므로 여러 사람의 사랑과 공경을 받으리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의 힘이 이와 같느니라.

지금까지는 외부에서 입게 되는 고통이나 내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일어나는 번민을 다스려주는 명의(名醫)로서의 관세음보살님을 만나왔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다 들어주는 전지전능하신 관세음보살님을 만날 차례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왜 불교를 믿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해서”라는 내용의 대답을 합니다.

“그것뿐입니까?”

“정말 그것만을 위해서예요?”

이렇게 캐어물으면 다들 씩 웃으며 말합니다.

“아, 뭐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야 기본이죠.”

어떻습니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란 바로 행복을 비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을 비는 마음이지요. 그것도 내가 죽고 난 다음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바로 지금 2003년도 11월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절에 복을 빌러 간다고 말하기가 좀 창피합니다. 불교가 고작 당신 집안이 잘 되기만을 빌어주는 ‘미신’인 줄 아느냐며 남들이 손가락질 할 거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보문품』에서는 이렇게 떡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자식 갖기를 원하면 관세음보살님을 예경해라, 그럼 들어주신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들어주신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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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꿈꾸는 듯한 표정의 예쁜 여자가 허름한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저… 여기 혹시 좋은 소식만 나오는 텔레비전 없나요?”

부자 되시라는 멘트로 한 때 우리나라를 부자열풍에 휩싸이게 만든 카드회사의 광고이지요. 저는 이 광고를 볼 때마다 정말 그런 텔레비전이 있으면 아무리 비싸도 한 대 꼭 들여놓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니까요.

사람은 행복해지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불행하다는 뜻이고, 불행하다는 것은 괴롭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을 좋아하는 이는 온 우주를 다 뒤져보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피하고 행복(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은 목숨 있는 자의 본능이라 하겠습니다.

“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으로, 마음으로 늘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면 복은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중아함 복경』)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들이 행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얀 종이에 솔직한 여러분의 행복을 적어보십시오. 좀 유치하다 싶어도 가급적이면 구체적으로 자신의 바람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분이 “아, 이 정도라면 나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라는 윤곽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적은 종이를 앞에 두고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소망들이 다 이루어질 거라고 여러분은 자신하십니까?

그리고 그 소망들이 다 이루어지면 진짜 여러분은 “나는 이제 행복하다”라고 만족하실 수 있습니까?

저와 가까운 사람 하나가 결혼한지 3년 정도 되어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네 집안에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열심히 병원 치료도 받고 온갖 민간요법을 구해 다니다 마침내 아이가 생겼고 ‘천만다행’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축하해요. 그토록 바라셨는데…. 건강하게 잘 기르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덕담을 건네는 저에게 그 산모가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이왕 아들 낳은 김에 아들 하나만 더 낳으래요. 그래서 딸만 있는 큰집에 보내래요.”

맙소사…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이렇더군요. 자식이 없을 때는 그저 아들이건 딸이건 아이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그 일이 이루어지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할 수는 없지요. 이러면 행복할까, 저러면 행복할까 하면서 행복의 조건들만 채워가다 그 귀한 한 생을 다 마칠 뿐입니다.

약초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이 나무에는 ‘내 것’이라는 이름을 가진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습니다.

봄이 되어 사람들이 약재를 따러 오면 ‘내 것’ 새는 이렇게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이건 내 것이다. 이건 내 것이다. 내 것. 내 것.”

하지만 사람들은 ‘웬 새가 이렇게 유난스레 지저귄담…’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은 채 무심히 약초를 다 따갔습니다. 새는 열매가 없어질까 걱정이 되어 목이 터져라 ‘내 것, 내 것’하며 울부짖었고 끝내 그로 인해 죽고 말았습니다.(『불설시아소경』)

행복의 조건들을 채워가다 결국 한번도 만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인간들의 모습이나 눈앞에서 제 것을 잃어도 아무 저항 못한 채 ‘내 것’이라고 소리치다 죽는 새의 모습은 그리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이 이렇습니다.

행복을 비는 인간의 실정이 이러할진대 『보문품』에서는 무슨 뜻으로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예배하고 공양하면 다 이루어진다고 하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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