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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9> 선업 닦는 이들 많으면 많을수록 사바세계 즐

by 가릉빙가 2009. 6. 20.

★~ 관세음보살 보문품 <09> 선업 닦는 이들 많으면 많을수록 사바세계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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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법답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법답지 못한 것임을


성문은 가르침의 소리(聲)를 듣고서야(聞) 수행이 진전되는 단계입니다. 사리불이나 목련존자처럼 부처님 당시 뛰어난 제자들이 모두 성문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바로 스승이신 부처님에게서 법을 듣고서 진리에 눈을 떠갔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자신에 대한 통제가 엄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된다, 저것은 안 된다, 그러면 큰일난다…라는 식으로 세상에 대해 여러 가지 잣대를 이리저리 맞추느라 그것을 넘어선 경지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던 것이지요. 그 잣대는 진리에도 적용되어 깨끗한 경지(열반), 더러운 경지(사바세계)에 대한 차별심에 얽매이는 폐단을 떨어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자들입니다.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의 성문제자들을 그런 차별심에 얽매이지 말게 하려는 노력은 도처에 보입니다.

그중 좬유마경좭에서 읽었던 사리불 존자와 하늘여인(天女) 간의 옥신각신 실랑이가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유마 거사의 방에 모인 이들의 대화를 듣다가 한없는 법의 기쁨을 느낀 하늘여인이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하늘의 꽃을 흩뿌렸습니다. 곱디고운 빛깔의 향기로운 꽃들이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은은한 향기가 유마 거사의 방에 퍼져가는 가운데 꽃들은 위대한 보살들과 엄격한 성문제자들을 가리지 않고 위에서 소복하게 내려쌓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보살들의 몸에 닿는 순간 꽃은 이내 떨어졌지만 성문 제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속과 인연을 끊은 수행자들 아닙니까? 사랑하는 어머니의 눈물도 냉정하게 뿌리치고 대문을 열고 나온 이들 아닙니까? 그런데 새삼 꽃이라니요? 그것도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 여인이 뿌린 꽃이라니요?

사리불 존자는 당황하여 제 옷에 달라붙은 꽃을 털어냈습니다. 하지만 꽃은 처음부터 그곳에서 피어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전을 읽으면서 꽃을 털어내려고 애를 쓰는 사리불 존자가 머릿속에 그려져 혼자서 웃은 적도 참 많습니다.

그러자 얄밉게도 하늘여인이 이렇게 묻지요.
“왜 꽃을 떼어내려고 하시나요?”
사리불 존자는 답합니다.
“이 꽃은 법답지 못하기 때문에 떼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늘여인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꽃은 법답지 못하다, 언제부터 이 방안에 있었느냐, 그렇게 도가 높은데 어째서 여인으로 살아가느냐는 사리불의 고정되고 편협한 사고방식들이 하나하나 깨어져가는 모습이 좬유마경좭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인 사리불이 ‘한갓’ 하늘여인에게 비참하게 깨져가는 모습이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문 제자를 향해 통쾌할 정도로 거침없이 반격을 펼치고는 있지만 이 반격은 성문을 부정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간 이 사바세계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 뼈를 깎는 고통 속에 최고의 경지인 열반을 얻었지만 그에 안주하지 말고 생사와 열반의 경지를 함께 보며 그 상대적인 가치마저도 넘어서게 하려는 부처님의 직접적이고 따끔한 지적인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대승불교권 사람들은 성문이란 존재를 아주 저열한 단계로 몰아붙여 왔습니다. 하지만 성문의 단계에서 닦아야 하는 법문들은 모두가 부처님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곰곰이 되새기기 보다는 걸림 없이 살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대승입네 하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이런 겁 없는 이들에게 황금보다 소중한 부처님 말씀의 가치를 다시 일깨워주기 위해 엄격한 성문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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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업 닦는 이들 많으면 많을수록 사바세계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

 

현실에는 우리와 같은 인간 세계가 존재하는가 하면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세상도 존재합니다.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한 사람이 가게 되는 욕계의 여섯 하늘과, 참선을 부지런히 닦는 이가 차례차례 나아가는 선정의 하늘인 색계의 열여덟 하늘과 무색계의 네 하늘이 그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해도 범부에게는 서로 뺏고 빼앗기며 작은 행복에 흡족해하고 작은 슬픔에 세상이 끝난 것처럼 몸부림을 치는 사바세계이지만 선업을 닦은 이들은 온통 즐거움이 가득 찬 세계를 누리고 있으며, 수행을 많이 한 이는 숨쉬는 한 찰나가 그대로 참선의 단계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하늘의 몸으로도 나타나서 구제의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범천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범천왕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제석천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제석천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자재천(自在天)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자재천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대자재천(大自在天)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대자재천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천대장군(天大將軍)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천대장군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비사문(毘沙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비사문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이 가운데 범천왕은 색계 가운데 첫번째 하늘을 맡고 있는 존재이고, 대자재천은 색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제석천은 욕계의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을 다스리는 왕인데 사천왕과 33천을 거느리며 인간이 선을 행하고 있는지를 항상 살피는 천신입니다. 자재천은 욕계 여섯 하늘 중에 으뜸가는 천신입니다. 다른 이가 지은 선업을 빌어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는데 『관음의소』의 설명에 따르면 자재천왕은 마(魔)의 세계를 부처님의 세계로 만드는 일까지도 하는 마왕(魔王)이라고 합니다.

천대장군에 대해서는 반치카라는 이름을 가진 야차대장이라는 『관음의소』의 설명과, 전륜성왕을 말한다고 하는 나카무라 하지메 사전의 또 다른 설명도 있습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똑같다고 하겠습니다. 비사문천은 절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천왕 가운데 북방을 다스리는 천신입니다. 중생들에게 재물을 주며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법문을 많이 듣는 장점을 가진 존재이지요.

소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소왕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장자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장자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거사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거사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관리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관리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바라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소왕(小王) 즉 작은 왕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나라의 통치자를 가리키는데 옛날 같으면 임금을 말할 것이요,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 같은 이를 말합니다. 장자(長者)는 경전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신분인데 천태대사는 ‘뛰어난 사람의 열 가지 덕’을 갖춘 사람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열 가지 덕이란 혈통이 고귀하고, 지위가 높고, 부유하고, 위엄이 있고, 지혜가 깊고, 나이가 지긋하고, 품행이 깨끗하고, 예의 바르고, 윗사람이 칭찬하고, 아랫사람이 잘 따르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관음의소』).

거사는 재물이 넉넉하고 집에 거처하며 가정과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이 많은 사람, 관리는 오늘날의 고위공무원에 해당될 것이고, 바라문은 깨끗한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인도에서 종교와 제사를 관장하던 계급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종교에 몸을 담고 있되 순수하게 홀로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행정을 겸하는 성직자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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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가 마땅히 지켜야할 것은

진리 추구와 지혜로운 침묵이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비구와 비구니는 남녀 출가자, 우바새와 우바이는 남녀 재가신자로서 불교의 승가를 구성하는 네 가지 큰 부류(사부대중)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후대로 이어지는 것은 이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비구와 비구니라는 말에는 빌어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고 우바새와 우바이라는 말에는 가까이 모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출가한 스님은 재가불자에게 밥을 빌어서 먹는 사람이고, 재가불자는 출가한 스님을 가까이 다가가 모시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는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부처님은 출가자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수행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두 가지에 힘써야 하나니 진리에 관해 말하는 것과 지혜로운 이의 침묵이니라.”(『증일아함경』 제34 칠일품)

부처님 당시 출가자는 그 어떤 생산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생산을 하지 않으니 소유할 것이 없게 되고 소유하지 않으니 시간이 온전히 남습니다. 하루 한 끼의 탁발을 마치면 남은 시간은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쏟아야만 했습니다.

반면 재가자인 우바새와 우바이에게는 이런 원칙이 적용하게 됩니다.

“세속에 살면서 집안을 잘 다스리고 목숨이 끝날 때까지 바른 믿음을 가지며 오계를 잘 지키기를 서원한 사람을 우바새라 한다. 우바새는 믿음을 지니고 계율을 잘 지키며 보시해야 한다. 하지만 수행자를 찾아가 법문을 듣지 않으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찾아가 법문을 들어야 하며 들은 뒤에는 몸소 실천해야 하니 이것이 우바새의 바른 삶이라고 한다.”(『잡아함경』제33권)

생산과 소유를 떠난 대신 생명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수행하는 출가자.

열심히 일하여 가정과 사회를 알뜰하게 가꾸고 출가자의 수행을 도와주는 재가자.

그런데 출가자에게는 법을 설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재가자에게는 그 법을 듣고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당시 출가자와 재가자들의 원칙적인 생활방식이었습니다.

물론 멀고도 오랜 인도의 풍조를 동북아시아에 자리한 21세기 한국 땅의 수행자와 재가불자에게 고스란히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유를 포기하여 자신을 비워내고 진리를 온전하게 담았을 때 출가자는 재가자의 존경과 봉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며 서투나마 닮아가려고 노력할 때라야 재가자는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속사정은 어떨까요? 출가한 스님들이 수행과 관련하여 대화를 하기 보다는 신자들의 가정사나 세상사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재가신자들 중에는 스님들이 들려주는 부처님 말씀에는 아예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우리 절 스님은 꿈풀이나 택일을 해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비난하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신 앞에 서서 부적을 써줄 생각은 하지 않고 보시해라, 기도해라, 경 읽으라며 성가시게 굴고 있는 저 스님, 태고의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당신의 법문에 싫증내고 있는 저 재가불자, 수행의 한 고비를 넘지 못하고 퇴전한 채 나의 옷자락을 자꾸만 끌어당기는 타락한 옛 도반이 바로 관세음보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당신과 나의 수행 정도를 가늠하고 따끔하게 인도하시고자 절 집안 도처에서 수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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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신념이 거룩한 향기가 되어

수많은 이들을 불법에 조복케 하리라



장자 거사 관리 바라문 부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그 부인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소년 소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소년 소녀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수마제를 아십니까?
급고독장자의 딸이랍니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태가 흘러서인지 마침 장자의 집을 찾은 친구 만재장자의 눈에 띄었습니다.
“내 며느리로 다오.”
느닷없는 청혼에 급고독장자는 망설였습니다.

‘만재장자는 친한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는 이교도를 섬기고 삿된 풍속에 빠져있는 지방의 사람이다. 내 딸을 보내면 보나마나 몸 고생 마음 고생할 게 뻔한데…’

하지만 “만일 수마제가 그 지방으로 시집간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만나 행복하게 살 것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용기를 내어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만재장자가 사는 성에는 다른 성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만약 법을 어기고 혼인을 시킨다면 육천 명이나 되는 범지들에게 극진하게 옷과 음식을 올려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만재장자는 자신의 위법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라 수많은 범지들을 초청하여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근사한 음식을 차려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 성 범지들은 몸을 반쯤 드러내는 차림새를 하였습니다. 반쯤 벌거벗은 범지들이 집안으로 속속 들어오자 만재장자는 허리를 굽히고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의 말 한 마디에 이 혼인의 성사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지요. 자, 그 날 수마제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옳을까요?

“아가, 곱게 차려입고 우리 스승님들께 절을 올려라.”
시아버지가 수마제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수마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예를 갖추지 않고 벌거벗고 있는 이들에게 절을 올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나 참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남편까지 나서서 아내를 채근하였지만 수마제는 요지부동이었고 그날의 연회는 몹시 어색하고 불쾌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만재장자는 갓 시집온 며느리 하나 때문에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며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습니다. 하지만 그때 또 다른 친구의 설득으로 며느리의 스승을 한번 만나보자고 마음먹게 되었고, 마침내 수마제의 청을 받아들인 부처님은 큰 제자들을 이끌고 그 성으로 들어와 진리를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수마제녀경』)

사실 우리는 여인에게 주는 부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을 찾아보라면 거의 『옥야경』을 들곤 합니다. 방자하기 이를 데 없고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옥야가 잘못을 뉘우치며 하녀와 같은 아내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그 경 말입니다. 그 밖에 이런저런 경이나 논을 근거로 보자면 대체로 불교는 여성을 깎아내리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부처님이 여성을 그저 애욕덩어리라고 구박만 하셨다면 수마제가 감히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불교의 여성관을 새롭게 조명할 때가 왔습니다. 여성은 남성이 그러하듯이 당연히 부처로 자랄 태아(여래장)입니다.

그리고 여성의 지위가 말할 수 없이 낮았던 그 옛날 인도 땅에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마침내 거룩한 진리의 향기를 풍기게 하였던 수마제야말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임에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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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다른 사람 살을 붙였으니

이 몸은 내 몸인가 남의 몸인가

 

어떤 사내가 길을 걷다 낡은 오두막을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자.’
들어서기가 바쁘게 뜻밖에도 귀신 하나가 뒤따라 들어섰습니다. 사내는 몸을 숨겼지요. 귀신은 금방 죽은 듯한 시체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고 와서 집안에 있던 침상 위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귀신이 좇아 들어와서는 그 시체를 내놓으라며 소리쳤습니다.
둘 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귀신이 제안하였습니다.

“이렇게 싸우기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증인을 세워 결판을 내자.”
뒤에 온 귀신도 찬성하고는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를 끌어내었습니다.
“너는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지? 말해봐라. 이 시체를 누가 가져왔는지….”
사내는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면 다른 편 귀신의 미움을 살 것이고 그리되면 제 목숨을 가져가려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목숨이면 사실대로 말이나 하자.’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저 분이 가지고 온 것”이라며 먼저 들어온 귀신을 가리켰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일은 벌어졌습니다. 시체를 빼앗기게 된 나중 귀신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내의 손을 비틀어 뽑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손이 달아난 사내…. 이 모습을 본 먼저 귀신이 시체의 손을 뽑아서 사내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더욱 화가 난 나중 귀신이 다리를 뽑았습니다. 먼저 귀신이 사내가 아파할 틈도 없이 시체의 다리를 뽑아서 사내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중 귀신은 사내의 몸통을 뽑고 머리까지 뽑아버렸습니다. 먼저 귀신은 사내의 사지가 뽑혀나갈 때마다 시체에게서 같은 부분을 떼어내 붙여주었습니다.

사내는 아프기도 하거니와 귀신들의 조화에 얼이 나가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지요. 그러다 두 귀신은 문득 싸움을 그치더니 주변에 흩어진 손발들을 먹고 배를 채운 뒤에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정신없이 싸우고 정신없이 먹어치운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귀신들…. 늦은 밤 외딴 오두막에서 벌어진 이 난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그제서야 사내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저는 ‘자신의 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그 몸이 ‘사내의 몸’입니까? 부모에게서 받은 손과 발, 몸통과 머리입니까? 아니라구요? 그럼 ‘시체의 몸’입니까? 하지만 생각은 지금 사내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나는 나인 것일까요, 내가 아닌 것일까요?

우리 사는 모습이 꼭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나야, 이건 내 것이야…라고 하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들은 ‘나’와 ‘나의 것’을 확실히 점찍어두고 지키려고 애쓰고 더 좋고 튼튼하게 만들려고 안달입니다.

지금 당신의 몸은 당신의 것입니까? 당신의 것이라면 그 몸은 당신의 마음먹은 대로 다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병들지 말아야지…’라고 마음먹으면 당신의 몸은 병이 들지 않습니까?
태어나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늦은 밤 낡은 오두막 속에서 한바탕 벌어진 귀신들의 조화 같은 이 세상에서 자신도 정신없이 휩쓸리다가 때가 되면 모든 것 그냥 다 내버려두고 업장 따라 떠나는 인간이 바로 ‘나’라는 말씀입니다. 사내에게 아주 멋진 화두를 안겨준 귀신들이 관세음보살임에 틀림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좥보문품좦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 등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모두 그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집금강신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집금강신을 나타내어 설법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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