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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7> 복은 과거에 지은 선업의 결과다 ~★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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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업을 짓지않고 행운은 없다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은 자기 옷은 스스로 꿰매서 입어야 했습니다. 제자 가운데 앞을 못 보는 아나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늘귀에 실을 꿸 수가 없었습니다. 아나율은 무심히 ‘이 세상에서 도를 얻은 아라한은 나를 위해 바늘을 꿰어다오’라며 생각하였는데 마침 부처님께서 그의 생각을 알아채셨던가 봅니다.
“바늘을 이리 다오. 내가 꿰어주리라.”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자 아나율은 당황하였습니다.
“저는 부처님께 청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복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청한 것입니다.”
송구하여 바늘을 내밀지 못하는 아나율을 향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증일아함』 『역품』)

이 일화를 보면 부처님도 복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아예 드러내놓고 다섯 가지 복을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어진 사람은 법을 설하여 다섯 가지 복덕을 얻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 복덕이냐 하면, 첫째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래 사는 것이요, 둘째는 세상에서 큰 부자가 되어 재물과 보배가 많은 것이요, 셋째는 단정하게 잘 생기는 것이요, 넷째는 명예가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정신이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것이다.”(『불조요경』)

다섯 가지의 내용은 하나같이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일을 하면 이 세상의 복을 받는다(『중아함 세간복경』)’, ‘저런 일을 하면 범천의 복을 받는다(『증일아함』 『고락품』)’라며 복받는다는 법문은 참 많습니다. 이런 것만 보아도 행운을 바라는 우리나 욕심을 떠난 부처님이나 복을 중시하는 것은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제 부처님이 권하는 복이 뭔지 좀 알아볼까요?

딱히 복(福)을 뜻하는 인도말을 집어내라면 범어로는 푼야, 팔리어로는 푼냐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공덕’, ‘선’, ‘가치 있는 행위’, ‘좋은 일을 함으로써 돌아오는 것’ 등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이란 것은 받을 만한 착한 일을 해서 받게 되는 즐거운 과보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처럼 만나게 되는 행운이란 것도 실은 내가 누릴 만한 정당한 사전작업을 해놓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중생들은 전생의 일(업인)을 알지 못하니까 ‘운이 좋았다’, ‘기적이다’라면서 결과에만 한없이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복이 넝쿨 째 굴러 들어오기까지 나 혼자만의 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 당첨의 꿈을 꾸면서 매주 복권을 삽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행운을 움켜쥐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런데 당첨된 사람들은 자신의 행운에 들뜬 나머지 자기가 가져간 돈이 알고 보면 내 이웃, 내 직장동료의 지갑에서 나간 돈이라는 사실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 논리를 따라가자면 이것도 다 내가 전생에 복받을 일을 했으니 당연히 받아가는 거 아니겠소?”

이렇게 따지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세상은 혼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행을 짓도록 힘이 되어준 무수한 인연들이 있었고, 내가 복을 받기까지 많은 인연들이 힘을 모아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차지한 행복, 현생에서의 복은 수많은 인연들의 희망덩어리였음을 기억한다면 나의 복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실현시켜주는 원인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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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계행-법-지혜 채워라

 

복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보문품』의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해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의미가 참 새롭게 다가옵니다.

첫째, 아이가 없는 사람이 아이를 원한다면…이라는 내용에서는 남들이 세속적이라고 비난해도 좋으니 마음속에 소망을 품으라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근(六根)을 가진 중생입니다.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과 함께 마지막에 나오는 의지[意]를 합한 말입니다. 이 의지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지를 지닌 사람이 바람을 갖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그리고 마음속에 간절한 바람을 품어보아야만 세상살이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거나 전혀 다른 바람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병상련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앙숙인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이 한 배에 타고 있는 것이 세상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옆 사람과 손을 잡고 머리를 빌리기도 하고 때로는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경쟁을 해서 쾌재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분하게 무릎을 끓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이 결코 녹록하게 나의 행복과 편의를 위해 두 팔을 벌리며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면서 우리는 정신적으로 성숙해 갈 것입니다.

둘째, 소망이 있으면 불보살님께 간절하게 예배하고 공경하라…라는 내용에서는 소망이 이루어지길 비는 자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배하고 공경하라는 말은 완전하게 선하고, 완전하게 바르며, 완전하게 성스럽고, 완전하게 깨달은 분을 불러내 그 앞에 일대일로 마주 서는 일입니다. 결투를 위해 마주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소연하고 소망을 빌려고 불보살님을 불러내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거나 남을 해치려는 생각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엎드려 간절히 소망을 고백하려면 먼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마음속의 티끌을 비워내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안거를 마치고 다른 지방으로 떠나려 하시자 마하남이라는 제자가 못내 아쉬웠습니다.

“세존이시여, 언제 다시 부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나를 만나려면 다섯 가지를 수행해야 한다. 믿음을 가져라. 깨끗한 계행을 지녀라. 법을 자주 들어라. 인색함을 버리고 쉬지 않고 보시하라. 지혜로써 법의 깊은 뜻을 살펴라. 그리하면 나는 항상 네 앞에 있을 것이다.”(『잡아함경』 제33권(932))

이 다섯 가지를 차곡차곡 내 안에 쌓는 일이 예배와 공경이며, 그런 나의 ‘부름’을 불보살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셋째, 『보문품』에서는 간절히 바라던 아들이나 딸을 낳아서 내가 행복해진다는 말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복덕과 지혜를 갖추고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의 행복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을 향해 크게 방향을 전환하기 때문입니다. 보란 듯이 낳아서 남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고 한풀이를 하게 해주려고 자식은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는커녕 그 아이는 남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하니 이쯤되면 그 아이가 세속의 덧없는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보문품』이 가르치는 기복은 이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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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만일 또 중생이 관세음보살을 공경하고 예배하면 복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으리니, 그러므로 중생은 모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어야 하느니라.

며칠 전 아주 가까운 분의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은 평생을 기도로 일관해오신 참 독실한 불자이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언제나 기도를 올린 것은 물론이요, 며느리가 법회에 참석하는 날이면 손수 집안일을 도맡아주시며 마음 편하게 공부하고 오라시던 분이셨지요. 떠나시는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하시다가 손주의 이름을 부르며 “이제 가야겠다. 나무 지장보살마하살”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손주가 가족들에게 연락하였고 보살님은 일가친척들과 조용히 작별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분의 얼굴은 참 편안하고 담담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하였습니다.

‘오직 화두 참구에 일생을 바친 눈푸른 선승도 아니요, 대장경의 바다에서 교리를 낚아올린 학승도 아니었을 고인이 어떻게 그리도 자신의 마지막 앞에서 태연하실 수 있었을까.’

인생살이가 얼마나 위태롭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광야를 가다가 큰 코끼리를 만났습니다. 코끼리를 피해 미친 듯이 달렸지만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 기적처럼 우물 하나를 발견한 그는 곧 그 안에 있는 나무뿌리를 찾아 그것을 잡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한숨 돌렸나 싶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나무뿌리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우물 벽에는 네 마리 독사가 이 사람을 물려고 혀를 낼름거리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우물 밑에는 세 마리 큰 뱀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그 때, 마침 다섯 방울의 꿀이 이 사람 입 속으로 떨어졌고, 그는 위험도 잊은 채 맛에 취했습니다. 그 순간 나무 뿌리가 흔들리더니 벌들이 날아와서 이 사람을 쏘았습니다. 하지만 우물 밖에서는 어디선가 들불이 일어나 이 사람이 매달려 있는 나무뿌리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생사를, 코끼리는 죽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우물은 사람의 몸, 나무뿌리는 수명을, 두 마리의 쥐는 밤과 낮을 비유하였고 나무뿌리를 갉아먹는다는 것은 세월이 쉬지 않고 지나감을 비유하였습니다. 네 마리 독사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이고 바닥에 있던 세 마리 큰 뱀은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입니다. 꿀 다섯 방울은 존재의 근간이 되는 오온이고, 벌떼는 나쁜 생각들입니다. 들불이 타오르는 것은 늙음을 비유한 것이지요.(『빈두로위우타연왕설법경』)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인지 새삼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생활하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간신히 매어달린 나무뿌리는 쥐들이 갉아먹고 있는데도 우리는 입 속으로 떨어지는 꿀 몇 방울에 취해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선업을 짓거나 자력으로 깨닫기란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덧없고 위태로운 지경에서 관세음보살을 향해 올린 예경은 우리에게 “불에도 타지 않고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으며 물에도 젖지 않고 도둑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사나운 벼락이 내리쳐도 부서지지 않고, 금고에 넣고 지키지 않아도 줄어들지 않는 복(『출요경』)”을 준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바세계를 헤쳐오느라 수행을 완성하진 못하였지만 우리는 구제의 약속을 받아낸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이는 이제 그 노보살님처럼 삶을 마감하는 자리, 앞을 짐작할 수 없는 윤회의 회오리 속에서도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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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마하살님을 공양하라

 

“무진의야, 만일 어떤 사람이 62억 항하의 모래 같은 보살의 이름을 받들어 목숨이 다하도록 음식과 의복, 침구와 의약 등으로 공양한다면 너의 생각에는 어떻겠느냐? 이 선남자 선여인의 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무진의가 대답하였다.
“매우 많겠나이다. 세존이시여.”

항하는 갠지스강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동쪽에 자리한 경포 해수욕장을 상상해보면 이 부분이 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경포에는 모래가 과연 몇 알이나 있을까요?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럽습니다. 여하튼 그런 백사장이 62억 곳이나 있으며 62억 곳의 모래알이라면 그 수는 또 얼마나 될까요? 상상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숫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아주 많은’이라고 표현하는 게 차라리 편합니다.

이렇게 많은 숫자는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보살마하살님의 숫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생동안 한 순간 한 순간 마다 각각 다른 보살마하살들을 예배하고 공양 올린다 하더라도 그 숫자를 다 채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온 우주에 가득 찬 위대한 보살들을 지극정성으로 받드는 것을 「보문품」에서는 “62억 항하의 모래 같은 보살의 이름을 받들어 목숨이 다하도록 음식 등으로 공양한다면”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좀더 쉽게 설명한다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처님과 보살님에게 깨끗하고 정성이 담긴 마음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친다면”이라는 말입니다. 불보살님에게 이런 예경을 올린 사람이라면 단연 급고독장자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불설중본기경』에는 급고독장자가 부처님을 처음 만나 기원정사를 짓게 되는 내력이 담겨 있습니다. 사위성의 급고독장자가 왕사성의 친구 집에 갔다가 석가모니 부처님과 승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장자는 친구가 부처님을 찬탄하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기쁨에 젖어들었고 급기야 그런 분이라면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성문을 나가 한적한 곳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을 들은 장자는 귀의하여 재가신자가 됩니다. 장자가 깨끗한 믿음과 한없는 기쁨으로 마음이 벅차오르며 부처님께 무릎을 꿇자 부처님은 묻습니다.

“그대의 나라에는 우리 승가가 머물만한 절이 있는가.”

부처님께서 이렇게 직접 ‘청탁’을 넣는 경우는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에서 참으로 만나기 힘든 일입니다. 스스로 티끌만큼의 욕심이 없고 또한 상대의 마음상태를 환히 꿰뚫는 분이시기에 이렇게 당당하게 청할 수 있었겠구나 짐작해봅니다.

부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안 장자는 자신의 나라에 수행과 포교에 적합한 절을 짓겠다고 약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고 안내해줄 사리불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절터를 물색하러 다니지요. 부처님 당시 절의 입지조건이라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으면서도 과일나무가 자라고 샘이 흐르며 작은 짐승들이 평화롭게 지나다니고 땅은 평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온 나라를 샅샅이 뒤지던 끝에 마침내 이런 조건에 꼭 맞는 땅을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땅은 기타 왕자 소유였습니다. 왕자 자신도 그곳이 매우 맘에 들었으므로 조금도 팔 생각이 없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그 땅을 파십사 애원하였지만 기타 왕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왕자가 제안을 하였습니다.

“만약 이 동산을 금화로 다 깔기만 한다면 그때 내가 땅을 팔겠소.”
장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금화가 그만큼 있을 리 없소. 어쨌든 장난으로라도 약속했으니 의심하지 말고 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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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순전히 장자를 놀려볼 심산이었건만 장자의 마음은 오직 부처님이 가득 들어차 있었기에 티끌만큼의 농이 깃들 수는 없었습니다. 장자는 이내 자신의 전 재산을 수레에 가득 실어서 왕자에게 보냈습니다.

나는 그저 장난으로 한 말이니 수레를 몰고 돌아가라는 왕자.

이미 당신은 동산의 값을 말하였으니 그건 팔겠다는 의사가 있는 거라며 부득부득 우기는 장자.

급기야 재판으로까지 가게 되었고, 현명한 노인들은 장자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제 장자는 손수 금화를 내려서 동산을 덮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서 』보문품『에서 “62억 항하의 모래 같은 보살의 이름을 받들어 목숨이 다하도록 음식 등으로 공양한다면”이라는 부분을 읽을 때면 저는 언제나 급고독장자가 왕자의 동산에 금화를 까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이 지긋한 거사님이 허리를 구부리고 그 넓은 동산에 금화를 한 닢씩 채워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장자는 이때 어떤 생각을 하며 그 힘든 작업을 해나갔을까요?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부처님의 모습만이 가득 차 있었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을 되뇌었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결국 장자의 신심에 감복한 왕자가 동산의 일부를 기증하기로 하고 그리하여 그 유명한 ‘기원정사’가 불교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기회가 온다면 급고독장자와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 학원비며 결혼자금 대주기도 힘겹고 노후대책 세우느라 빠듯한 우리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마음은 더욱 옹색해져 불우이웃을 돕거나 절에 시주할 때면 남들 하는 거 만큼 해서 ‘욕만 안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 비교할 때 급고독장자의 보시는 그 공덕이 얼마나 클까요? 그가 받게 될 공덕을 짐작해보면 나의 보시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불보살님에게 공양하는 일은 급고독장자처럼 큰 부자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요, 나의 ‘푼돈 시주금’은 아예 내밀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나 』보문품『의 다음 구절은 그런 우리의 생각이 한참 잘못되었음을 일깨워줍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어 한 때만이라도 예배하고 공양한다면 이 두 사람의 복이 똑같아 다를 바 없어, 백천만억 겁에 이르도록 다할 수가 없으리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아 지닌다면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없는 복덕의 이익을 얻느니라.”

부처님은 급고독장자가 그같은 공양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님에게 했더라도 내가 한 순간에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가슴에 간직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올리며 공양한다면 그 공덕이 똑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세음보살 단 한 분이 한 순간에 품는 사랑과 힘이 시방삼세를 가득 채운 보살님들의 힘을 모아놓은 것과 아주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는 이렇게 큰 힘과 사랑을 지닌 관세음보살님이 계십니다.
불러 보십시오.

간절하게 그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힘도, 돈도, 시간도 들지 않는데 뭘 망설이십니까?

수행에는 참선이나 경전 연구와 같은 어려운 수행법과, 보시나 염불이며 절과 같은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참선을 좀 했다고 하여, 경을 좀 읽었다 하여 다 깨달은 양 으스대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나 단 한 순간이라도 관세음보살을 마음에 떠올리는 일조차 하려들지 않는다면 이것은 더 큰 교만이요, 가장 무거운 죄악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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