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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8> 도솔천서 사바세계로 온 뜻은 ~★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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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눈먼 중생구제 위함이라

무진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어떻게 이 사바세계에서 노니시며, 어떻게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시며, 방편의 힘은 그 일이 어떠하나이까?”

무진의보살은 』보문품『에서 딱 두 번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첫째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에 담긴 뜻을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이름을 설명하시면서 저와 같은 중생들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쉬지 않고 부르라고 답하셨습니다. 즉 구제를 바라는 중생의 입장에서 설명한 부분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머물고 계신가, 중생을 위해서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법을 설하시는가, 어떤 수단(방편)을 쓰고 계신가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펼치는 관세음보살의 입장을 설명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질문 하나만 보더라도 ‘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펼친다는 것이 진짜 어렵긴 어려운가보다’하는 생각에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됩니다. 왜냐면 다른 부처님나라, 예를 들면 극락정토 같은 곳은 흐르는 물소리, 지저귀는 새소리가 그대로 진리를 읊조리는 설법 소리여서 애써서 법을 설하려 하지 않아도, 시간을 쪼개어 법문 들으러 좇아 다니지 않아도 자연히 법을 듣고 수행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듣는 이들이 평소 쌓아온 덕행의 차이에 따라 깨달음을 얻는 데에 빠르거나 느린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곳이라면 무진의보살의 이런 질문이 오히려 무색할 것입니다.

이제 무진의보살의 질문에서 중요한 단어 두 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사바세계’라는 말입니다.

‘사바’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이름입니다. ‘사하’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소리나는 대로 옮긴 말인데 ‘참고 견뎌야 한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괴롭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무량수경』에서 아주 잘 그려놓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잘 것 없는 일들을 다투어 구한다. 악과 괴로움으로 들끓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때문에 허덕이며 겨우 생계를 꾸려 나간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돈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있다. 하지만 사실 돈이 있건 없건 근심 걱정은 떠날 날이 없다. 불안 끝에 방황하고, 번민으로 괴로워하여 엎친 데 덮치고 욕심에 쫓기느라 조금도 마음 편할 새가 없는 것이다. 논밭이 있으면 논밭 때문에 걱정하고, 집이 있으면 집 때문에 속을 썩이며, (중략) 있으면 있다고 해서, 없으면 없다고 해서 걱정하고 한숨짓는다. 때로는 뜻밖에 수해나 화재 혹은 도둑을 만나 재산을 잃어버리고 원통해하고 슬퍼한다.”

온통 괴로움뿐인데도 괴로운 줄 모르고 살아가며, 알더라도 견디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이 세상 존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세상을 헤쳐가느라 사람들의 심성은 아주 억세지고 완고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어리석음으로 눈이 어두워 경전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장래 일을 생각지 않고 눈앞의 쾌락만을 따르며, 애욕에 빠져 인륜을 알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재물과 색을 탐한다.(중략)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세상일에 허덕이며 저마다 가슴에는 독기를 품고 있다. 그러한 독기 때문에 눈이 어두워 함부로 일을 저지른다.”(『무량수경』)

기쁜 일에 맘껏 좋아하거나 도움을 받아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이웃의 불행에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진리를 말해주어야 할까요? 사랑의 매를 들고 교탁 앞에 선 훈장님처럼 곧이곧대로 가르친들 어느 누가 귀를 기울이고 눈길을 주겠습니까? 그러니 이 속에서 가르침을 펼치려면 방법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방편이라고 표현하지요. 무진의보살의 질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이 ‘방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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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근기에 따르기 때문이다

 

아주 큰 부잣집에 어린 외아들이 있었는데 무단으로 가출하여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한 시도 잊지 않았지만 아들은 자신의 신상에 관해서는 죄다 잊어버리고 거지처럼 떠돌아 다녔습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우연히 자신이 태어난 고향거리에 들어선 아들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갑부의 행차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고작 ‘어쩌면 왕보다 더 부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세력도 막강할 텐데 만일 내가 왔다갔다 하는게 눈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나를 붙잡아다 학대하고 종처럼 부릴지도 모른다. 도망가자.’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도망치려던 아들을 알아본 아버지는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아랫사람을 불러 무조건 잡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지 아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버둥을 쳤고 그런 모습을 본 갑부 아버지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꾀를 내었습니다.
일단 풀어준 뒤에 하인들을 다시 보내어서 딱 어울리는 일자리를 줄 터이니 가보자고 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거지 신세만큼은 면하게 해준다는 하인들의 말에 솔깃하여 따라왔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와서는 가장 천한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게 마음 편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참 동안을 천한 일하며 지내다가 어느 정도 숙련되면 신분을 조금 높여 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아들은 처음의 거지 신분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부잣집의 집사 정도 되는 신분이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지요. 빌어먹고 홀대받던 처지에서 완전히 벗어나 어엿한 재산관리인으로까지 승진하게 되자 임종을 앞둔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오래 전에 무작정 잡아오려 했을 때 보인 반응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놀라기는 하였겠지만 이미 아들의 마음자세는 매우 성숙해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집안을 잘 이끌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법화경 신해품』)

‘방편’이란 말은 어딘가에 다가가게 한다, 또는 다가가게 하려고 내는 지혜를 뜻합니다.

부자 아버지가 처음에 거지 아들에게 보인 태도는 전혀 현명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거지 아들이 냉큼 따라갔다 해도 그는 거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위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취하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화려한 비단옷만 몸에 걸쳤을 뿐 그의 몸체는 한 끼 빌어먹는 것이 전부였던 거지의 습(習)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에게 아버지의 자리에 다가가게 하려고 내었던 꾀가 바로 방편입니다.

거지 아들이 본래는 고귀하고 부유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것처럼 우리들 각자도 나고 죽는 윤회의 갈래를 처음부터 벗어나 있는 부처의 씨앗(여래장)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익혀온 나쁜 습관에 젖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당연한 듯 여기며 그 속에서 욕심내고 성내고 그릇된 견해에 빠져 있는 것은 마치 거지 아들이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얼마나 다양하고 단계적인 방법들을 생각해내셔야 했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생들의 수준에 맞추어 법문의 내용에 차례를 두는 방편을 주로 사용하셨다면 부처님의 전령인 관세음보살은 구제를 청하는 중생의 수준에 딱 맞게 스스로의 겉모습을 바꾸는 방편을 주로 쓰셨습니다. 무려 30가지가 넘는 변화된 몸(化身)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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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영업직에 몸담고 있다면 실적을 올려줄 고객을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꼭 이상형은 아니라도 좋으니 그럴듯한 이성을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헤어진 피붙이나 첫사랑, 내 일손을 덜어줄 사람 등등 지금 만나고 싶은 사람을 손꼽으라면 참 많은 이들을 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거나 만날 예정이 되어 있는 사람은 대상에 맞게 스스로를 가꾸고 내보일 준비를 깔끔하게 합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큐 사인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텔레비전 뉴스 앵커처럼 말입니다.

상대를 만나면 정중히 명함을 건네고 깍듯하게 인사를 합니다. 가급적 고운 말을 쓰고 적당히 양보하며 최선을 다해 상대한 뒤에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진 내 명함이 그 사람에게 다시 한번 읽혀지기를 기대하면서 작별인사를 건넵니다. 이런 만남은 대체로 호의적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라는 경전의 말씀을 충실하게 실천한 셈이니 좋은 결과를 남길 것입니다. 예정되어 있고 목적하였던 만남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사단은 꼭 예기치 못한 데서 터집니다.

혹시 당신은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어느 날 당신의 일상에 너무나 커다란 힘을 가해오는 일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또는 나보다 수준이 한참 떨어져 보이는 이가 감히 나의 자리를 넘보거나 함부로 나를 비판하는 일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원효 스님이 바로 이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스님이 기도를 하려고 동해안을 찾았다가 벼를 베고 있는 여자를 보았습니다. 장난기가 일었던지 “그 벼 좀 주지 않으려오?”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벼는 거칩니다”라는 무뚝뚝한 답을 던지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좀 무안하기는 하였지만 크게 괘념치 않고 계속 길을 걷다 어느 다리 아래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지요. 빨랫감은 옛날 여성들이 사용하던 천 생리대였습니다. 이번에 스님은 물 한 그릇을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피가 섞인 물을 떠서 내밀었습니다. 누가 선뜻 그 물을 마시겠습니까? 원효 스님은 당연히 불쾌한 마음에 그 물을 쏟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직접 물가로 내려가서 맑은 물을 떠서 마셨지요. 목마름을 달랜 뒤에 둘러보니 빨래하던 여자는 간데 없고 여자의 신발 한 짝만 남겨져 있었습니다.

‘거 참 신기한 일일세…’라고 생각하면서도 금세 잊어버리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습니다. 그런데 기도처에 도착하고 보니 관세음보살의 좌대 밑에 여자 신발 한 짝이 놓여 있었습니다. 크기며 생김새를 보아하니 아까 보았던 그 신발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

그제서야 스님은 ‘앗차!’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습니다. 신발의 주인은 바로 관세음보살이었던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기도하러 나선 스님을 시험해보려고 처음부터 스님 앞에 나타났던 것이지요.

결국 원효 스님은 기도처 앞에까지 갔다가 풍랑이 크게 일어서 들어서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강원도 낙산사에 얽힌 일화입니다.

당대의 최고 지성이라 할 수 있는 원효 스님과 이름도 없는 품팔이 여자, 남성 출가자와 생리대를 빠는 여자……. 이 얼마나 극과 극의 대비입니까? 대수롭지 않게 스쳐지나 기억도 나지 않는 여자가 알고 보니 그토록 친견하길 바랐던 거룩한 관세음보살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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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오늘 사이 당신이 만난 이들….
책상을 마주 놓고 일하고 있는 직장 동료, 옥신각신 물건값을 흥정하다 헤어진 시장 상인, 어젯밤 술자리에서 내 옆에 앉았던 사람, 지하철에서 좌석 하나 놓고 잠깐 신경전을 벌인 여자…

앞서 원효 스님의 경우를 비추어 보면 이런 사람들 가운데 어쩌면 관세음보살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관세음보살이 누구에게나 불쑥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다른 문제는 없는데 이성에게 자주 끌려.’
‘다른 건 관심 없어. 내 가족만 행복하면 되.’
‘왜 나는 운전대만 잡으면 거칠어지는지 모르겠어.’
‘주겠다는데 왜 돈을 거절해야해? 일단 받고 보자.’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발칵발칵 성을 내는지 모르겠어.’
이런 사람들….

‘스님이 대신 기도 잘 해주시겠지. 하루쯤 내가 빠진들…’ 이렇게 자기 기도조차도 끝내지 못하고 꾀를 부리기 시작하는 사람.

‘불교? 그게 별거 아니더라구. 그저 자기 마음자리만 잘 찾으면 그게 불교더라니까…’라고 말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사람.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내가 가장 약해지고 사악해질 때 나의 아킬레스건을 찌르며 나타납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천박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너무나도 평범하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님도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의 고통을 고스란히 내 것인 양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야지만 사람들에게 꼭 맞는 구제법을 내릴 것 아니겠습니까? 고민 끝에 내린 방법이 좥보문품좦에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어떤 나라의 중생을 부처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관세음보살이 곧 부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벽지불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벽지불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성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성문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신다.”

남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를 인격적으로 성숙시킬만한 덕망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해도 상대방의 수준을 정확히 갈파하고 있지 않다면 헛일입니다. 지금 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저 사람이 가장 크게 마음을 돌리려면 누가 필요한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세요.’
학습지 광고에 무진장 나오는 말입니다.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를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아이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함께 고민하고 길을 찾아보라는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바로 이런 눈높이 구제에 가장 능숙한 분이십니다. 저 높은 곳에 고고히 머무시며 ‘수고하고 힘들면 이리로 오라’고 두 팔을 벌리거나 손짓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를 낮추고 망가뜨려 구제의 대상과 꼭 같이 하나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세상을 살펴보시니 지금 구제를 바라는 어떤 이가 있는데 이 사람에게는 다른 누구도 아닌 부처님이 가장 필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벽지불이 나타나서 일깨워주어야 정신을 차릴 것 같으면, 그리고 성문의 몸으로 가르침을 줘야 할 사람이 있으면 관세음보살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 꼭 맞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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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 후에도

중생 제도를 위해 이 땅에 나투시다

 

그런데 보십시오. 관세음보살이 부처의 몸으로 나타나기도 한답니다. 우리는 ‘보살’에 대해서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보살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
보살이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
보살이란 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하기 전 과거세에 수행하던 몸을 가리키는 말.

보살이 이런 자라면 부처님과는 격이 한참 떨어지는데 어떻게 그런 보살 신분에 감히 부처의 몸으로 나타난다는 말일까요?

이런 의심을 짐작이나 하고 있었는지 여러 경전에서는 친절하게도 관세음보살이 아직 수행해야 할 수행자의 신분이 아니라 이미 부처를 이룬 뒤에 중생을 위해 다시 보살의 몸으로 내려온 분이라는 설명을 곳곳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 관세음보살의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한참 넘어서 있다.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 전에 성불하여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라 하였으나 대비원력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 완전한 안락함을 주려고 다시 보살로 나타난 것이다.”(『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

이렇게 보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부처님 곁에서 함께 중생제도에 힘을 쏟고 계시는데 이분은 다시 한번 성불을 하실 기약이 있습니다.

아미타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수명과 광명을 의미합니다만 이 부처님의 수명도 언젠가는 끝이 날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 즉 정법이 세상에 남아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요, 중생들은 삼매에 들어서 부처님을 눈앞에서 만나 뵙고 가르침을 듣기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정법의 힘도 차츰 약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생들은 어찌해야 할까요? 정법만을 믿고 의지해오던 수행자들은 또 어찌해야 할까요? 하지만 바로 그때 관세음보살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열어 보광공덕산왕(寶光功德山王)이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관세음보살수기경』).

육신으로 나서 우리에게 오신 부처님은 어쨌거나 수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구간을 힘껏 달려온 주자가 다음 번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듯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 이어가고 전해주는 진리는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이나 아미타부처님이 새롭게 만들어낸 원리원칙이 아니라 생명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있어온 법칙이요, 그 법칙을 확실하게 알아챈 분이 부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관세음보살이 부처의 몸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이끌고 구원한다는 것에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아직 수행을 더해야 할 수행자인 보살이 아니라 이미 수행을 완성하여 정법을 책임지고 퍼뜨려야 할 임무가 있는 분이요, 그러자니 한없이 큰 소망을 품고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오신 부처님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은 벽지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벽지불이란 프라티에카 붓다, 파체카 붓다라는 말을 소리나는 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독각(獨覺)이라고 번역합니다. 홀로 깨달았다는 뜻이지요.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깨달음을 열었지만 홀로 그 경지에 머물러 있기에 대승불교권의 논사들로부터 소승(小乘)이라는 비판을 받게까지 되었습니다. 독각은 연각(緣覺), 연일각(緣一覺)이라고도 합니다. 연(緣)이라는 한 가지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합니다. 바로 12연기입니다. 깨달았다는 면에서는 부처님이라 칭송받아야겠지만 12연기 하나만을 깨달았을 뿐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 즉 아뇩다라삼약삼보리를 얻지 못하였기에 우리들 중생들은 벽지불을 부처님이라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