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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5> 공경에 처하면 정성껏 염하라 ~★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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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에 처하면 정성껏 염하라

 

“무서워말고 두려워 말라.”

읽을수록 저에게 힘을 주는 대목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하거든 큰소리로 관세음보살을 외치라는 이 대목은 『보문품』의 절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밖에서 오는 위협이나 고통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두려움도 오로지 ‘관세음보살’이라고 크게 외치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은 우리들 마음속의 두려움을 없애주어 떳떳하게 그 대상과 맞서도록 일러주는 부모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틈새를 일러주고 도망갈 길을 열어주고 숨통이 트이게 해주는 존재. 이런 관세음보살을 가리켜 석가모니 부처님은 ‘시무외자[施無畏者]’ 즉 중생에게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를 베푸는 자라고 딱 집어서 일러주십니다. 앞서 우리는 두 가지의 보시에 관해 경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보시의 종류가 세 가지로 늘어났군요. “선남자야, 보시에 세 가지가 있으니 법의 보시, 재물의 보시,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이다.” 『해심밀경』

『해심밀경소』에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에 관해 “사자·호랑이·이리·귀신·도깨비 등의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고, 왕·도적·물·불 등의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물의 보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법의 보시는 다른 이보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법을 받아 지녔다면 할 수 있는 일인데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는 세상의 이치에 밝아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미 벗어난 자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는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보시이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베풀어야 할 보시도 바로 이것이겠습니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 알고 계시지요? 어떻게 들으면 좀 불교를 깔보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그만큼 염불은 쉬운 일이고 품이 들지 않으면서도 업장을 녹이는 수행법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이때는 ‘노는 입에 칭명한다’라고 말해야 좀더 정확할 것입니다. 염불(念佛)은 말 그대로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불보살님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명(稱名) 역시 글자를 풀이해보면 이름을 소리내어 부른다는 뜻이니 지금까지 『보문품』을 읽어온 우리는 염불이 아니라 칭명의 수행을 익혀온 것이라 해야 맞습니다.

『보문품』에서는 칭명할 때와 염불할 때,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공양 올리고 절할 때를 나누어놓고 있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수행을 했으니 염불삼매가 더 맞아’라든가 ‘칭명으로 시작하다가 나중에 염불삼매에 들어야지’라며 수준을 세우거나 순서를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그때 내 처지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앞서 ‘바람의 난’에서부터 ‘도둑의 난’까지는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또는 그 중에 단 한 명이라도 큰소리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모두가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감당해낼 수 없는 위협을 당하였을 때는 무조건 큰소리로 관세음보살을 불러보는 것이 제일입니다. 당장 칼이 목에 들어오는 데 삼매에 들 수도 없습니다. 꽁꽁 묶인 처지라 108배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이제 나는 죽었구나’하는 마음으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쳐대는 길밖에 없는 경우가 지금까지의 『보문품』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꼭 이렇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지경에 놓이지는 않더라도 백두산보다 더 높이 분노가 치솟거나 바닥을 알 수 없는 우물처럼 검고 깊은 음욕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보문품』은 그런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법을 일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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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생각하라

 

또 만일 중생이 음욕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음욕을 여의게 되며, 혹은 성내는 마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마음을 여읠 수 있으며, 혹은 어리석음이 많더라도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고 공경하면 곧 그 어리석음을 여읠 것이니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이 이런 위신력으로 이롭게 함이 많으니 중생은 마땅히 마음으로 항상 생각할 것이니라.

참 중요한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을 항상 생각하라’ 즉 염불(念佛)이라는 말과 ‘삼독심’입니다.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염보살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관세음보살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러니 염불이라는 말로 이 부분을 설명해도 결코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불교수행에서 ‘염’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 위파사나 수행법이 크게 각광받으면서 이 염(念)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음챙김’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지요. ‘염’은 스므리티(smrti), 사티(sati)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생각하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뜻을 지닌 말이지만 생각도 어떻게 하는 생각인가에 따라 수행이나 기도의 진척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염(念)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해탈도론』에는 “불세존의 보리공덕을 생각하고[念] 따라서 생각하고[隨念] 기억하여 지니고[念持] 잊지 않으며, 염근, 염력, 정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드문드문 머리 속에 떠오를 때마다 기억해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과 공덕을 지극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나도 흉포한 강도를 만나 쫓긴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은 도망치다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지금 무슨 생각이 일어날까요? 오직 어떻게 하면 저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인가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지극한 마음, 지극한 생각이라 부르며, 원효스님은 『무량수경종요』에서 부처님의 이름이나 상호를 생각하는 자의 자세는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지극한 생각이란 앞의 생각이 끝나기 전에 뒤의 생각이 이어지면서 그 사이에 잡념이 들어와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렇게 한 순간이라도 끊어지지 않고 하나의 생각을 깊게 이어갈 수 있어야만 염불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불보살은 어머니요, 중생은 자식이라는 공식으로 신행생활을 해왔습니다. 집밖에 나가서 친구와 어울릴 때, 그리고 일이 잘 풀리거나 밖의 생활이 즐거우면 집안에 계시는 부모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맙니다. 그러다 용돈이 떨어지면, 몸에 병이 들면, 나이 들면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다시 떠올리며 아쉽고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안됩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아주 잘 설명한 경이 있습니다.

“만약 자식이 어머니 생각하기를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듯 한다면 이들 모자는 많은 생을 지나도록 서로 어긋나지 않으리라. 이와 같이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금생이나 내생에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할 것이며 머지않아 스스로 마음을 깨달을 것이다.”(『대불정수능엄경』)

즉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듯 불보살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보살님을 자식인양 여기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지금의 내 모습을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하며 부모 생각에 애태우는 자식의 마음으로 불보살님을 생각하라는 말이고, 이것이 염불의 바른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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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기도 보다 더 큰 효과

 

간혹 불자들 중에는 “기도하는데 무슨 효과를 바라고 하는가?”라든가, “나는 그저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하려고 염불할 뿐인데…”, “한 생각 잘 지키면 부처님인데 아직도 뭘 그리 바라는 게 많은가?”라는 이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린 목적이 있어서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작게는 세속에서의 정당한 행복을 이루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고, 내 마음을 스스로 맑게 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내가 바로 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 불자가 마음에 지니는 이런 목적을 서원(誓願)이라고 달리 표현해봅시다. 마음의 번뇌를 씻고 무명을 제거하여 밝고 진실한 경지와 하나되는 일이 내 개인적인 서원이라면, 밖으로 눈을 돌려 이 모든 생명체가 나와 똑같은 경지를 얻기 원하는 것이 또 하나의 서원이 됩니다.

목적이 뚜렷하게 서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잘 걸어갑니다. 간혹 흔들리거나 길을 잘못 들었다해도 목적이 분명하기에 이내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서원을 간절하게 마음에 품은 사람도 이와 똑같습니다. 아무런 바람도 없고 의욕도 없이 그저 맑은 경지만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보다는 크고 작은 바람을 품고 열심히 그것을 이루려고 사는 사람이 더 불교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 그 바람이란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는 올바른 것이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원이 굳건하게 선 사람의 기도는 간절합니다. 불보살님을 생각하는 마음도 가을하늘처럼 맑고 용광로처럼 치열합니다. 항상 중생을 위해 달려올 자세가 되어있는 분을 향해 누군가가 간절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그 분을 떠올리고 생각한다면 이제 기도의 효과는 극대화됩니다. 중국 송나라 때 천태종의 지례(知禮) 스님은 바로 이런 경지를 감응도교(感應道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간절히 부르는 자[能感]와 두말없이 따라주는 자[能應]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진 것[道交]입니다.(좬관무량수불경소묘종초좭 권4)

주파수가 맞추어져야만 맑고 깨끗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시너지효과를 본 것입니다. 이런 효과는 우리가 무난한 일상생활을 하는 때보다는 지독한 번뇌에 시달릴 때 더 빛을 봅니다.

좬보문품좭에서는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치솟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지성으로 생각하면 그런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삼독심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런 번뇌를 여의려고 애쓰는 사람이 이에 해당합니다.

삼독(三毒)은 선근을 무너뜨리는 세 가지 번뇌를 말합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위험한 녀석인지 독(毒)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데 아시다시피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욕심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욕심의 대상은 물건, 돈, 음식, 잠, 명예, 이성 등 매우 다양합니다. 좬보문품좭에서는 그중 특히 음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강렬한 욕구입니다. 저와 같은 재가불자의 경우라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음란한 마음을 품는 것이요, 출가수행자의 경우는 애욕(愛慾) 자체가 여기에 속합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너무나 커서 제 몸을 학대한다던가 혹은 이성의 유혹이 너무 강하여 수행에 애를 먹은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심오한 교리로 가득 찬 경전 사이에서 만나는 이런 일화들은 대번에 저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끌어당깁니다. 이런 제가 좀 불경스러운가요? 그 가운데 인자하고 온화하며 집중력이 가장 뛰어났던 아난존자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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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혹과 환란서도 벗어난다

 

“물 좀 주십시오.”
아난 존자는 우물가의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은 슬쩍 아난 존자를 훔쳐본 뒤에 답하였습니다.
“저는 천하디 천한 계급입니다. 저와 같은 계급의 사람이 어찌 스님같은 분에게 물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낮은 계급의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과 마주 서서도 안되고 바라보아도 안되며 제 손으로 물건을 집어서 줄 수도 없었던 것이 엄격한 인도 계급사회의 법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속의 그런 잣대를 벗어버린 출가자요, 한없이 인자한 아난 존자가 아닙니까?

“저는 물이 먹고 싶습니다. 물을 주십시오.”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아난 존자는 거듭 물을 청하였고 그런 태도에 여인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물을 떠서 존자의 발과 손을 적셔 드리고 마실 물을 올렸습니다. 아난 존자야 목마름을 풀었으니 그걸로 끝이었겠지만 사단은 여인에게 벌어졌습니다.

언제나 세상사람들의 멸시와 냉대만을 받아오던 천한 계급의 여인이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대해주며 다가오는 남성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님에게 예를 갖추느라 손과 발을 제 손으로 적셔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난 존자의 품위 있는 행동과 따뜻한 눈길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만 여인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저는 아난 존자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죽어버릴 거예요.”
일의 전모를 안 어머니는 기가 막혔지만 딸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채고는 온갖 술수를 부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주문을 외워서 아난 존자가 제 발로 딸의 방으로 찾아오기를 기원하였던 것이지요.

한편 아난 존자는 이런 사정도 모른 채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지는게 이상하였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전날 우물가 그 여인의 방에 자신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미 애욕의 주술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는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여인의 육탄공세에 정작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난 존자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여인의 간절함 그 곱절의 마음으로 스승이신 부처님을 불렀습니다.
‘아, 부처님… 왜 저를 구해주지 않으십니까?’

아난 존자의 기도는 부처님에게 닿았습니다. 이내 부처님도 주문을 외우셨습니다. 그 주문의 힘으로 인해 여인의 방에는 검은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고 방안의 그릇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습니다. 애욕의 주술은 그 앞에서 맥을 못추었고 놀란 여인도 아난 존자에게서 떨어졌습니다.(좬비나야좭)

부처님의 주문이 궁금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삼보의 정신을 깨닫고 그에 귀의하나니, 아난이여, 그 여인의 집에서 풀려나라”라는 게송이었습니다.

애욕에 휘감길 때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고 다급하게 스승님을 기억해낸 아난 존자의 ‘지혜로움’에 찬탄을 보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불러야 하는 마음가짐도 그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마침 세간에는 ‘스와핑’이라는 단어가 떠돌고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외도를 즐긴다는 뜻이지요.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불사음계가 휴지조각처럼 내동댕이쳐지는 세태입니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랑이라 불릴 수 있는 관계는 지금의 배우자와 나누는 사랑입니다. 만일 부당하고 은밀한 유혹이 덮쳐 온다면 올바르지 못함을 빨리 깨닫고 아난 존자처럼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죽기살기로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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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선정의 하늘까지 태운다

 

아무리 옷을 잘 차려입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추하게 보이십니까?

편안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이성을 잃어 선과 악이 뒤바뀌어 보이며 끝내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일을 저질렀습니까?

어렵게 모은 재산을 잃고 송사에 말려들었습니까?

끝없는 노력으로 얻은 명성을 잃었습니까? 친구와 일가 친척들이 당신을 피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에게 이런 징후가 보인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 분노의 검은 회오리에 휘감겼음을 의미합니다.(『중아함 원가경』)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 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는 병, 바로 화병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 즉 분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거운 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한국 사람의 화가 공식적인 병명으로 기록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 나라 사람이 화라고 하는 번뇌를 현명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간 화병은 가정주부들에게 주로 일어난 병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족들 뒷바라지에 자신을 온통 희생하기만 한 결과 중년에 접어들어서는 그렇게 살아온 일생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끝내는 한이 맺혀 몸의 병으로까지 전개되고만 여성들이 그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라는 세련된 외래어로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번민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제 화나 스트레스는 한 개인의 사소한 짜증을 넘어서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홧김에’ 저지른 사건들이 신문지면을 연일 채우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사실 화를 풀어버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마음에 품고 있지 말고 외부로 확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꼬박 큰 소리로 노래부르고 나면 쌓인 화가 다 풀어지는 경우를 느끼셨을 겁니다. 신용카드 들고 나가서 평소에는 사지 못하였던 물건들을 한아름 사들이는 것도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 들어갑니다. 또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대상 앞에 나서서 용감하게 조목조목 따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후환이 두려워서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못쓰는 가전제품을 부수거나 인형에게 망치질을 하면서 화를 풀게 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가서 몽둥이나 망치를 들고 내가 쓰러질 때까지 분풀이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몸부림치듯 마음속의 화를 풀고 난 뒤에 돌아서서 나올 때는 참 허전합니다. 분풀이를 해댄 뒤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째 상큼하지도 가뿐하지도 않습니다. 밥을 먹고 난 뒤에 숭늉으로 입가심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아, 산다는 게 뭘까?’ ‘왜 나에게는 이런 일만 찾아오지?’ ‘다 그때 뿐이야’라는 마음이 솔솔 생겨나게 됩니다. 결국 현실적으로 문제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는데 자기 혼자만 북치고 장구치면서 ‘화났네’, ‘풀렸네’를 반복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깊은 자괴감…

“원수에게 성내고 원망하는 건 스스로 마음을 볶는 것일 뿐”(『보살본연경』)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분노는 이렇게 사람을 망쳐갑니다. 탐욕의 번뇌는 한순간 마약 같은 쾌락이라도 주었건만 분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하나를 망가뜨립니다.

“치열한 번뇌에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있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분노의 번뇌가 가장 심하니 그 불은 욕계로부터 첫째 선정의 하늘까지 태운다.”『출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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