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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4> 선과 악 갈림길서 주저할 땐 ~★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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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염하며 의지하라

 

혹은 삼천대천국토에 가득한 야차와 나찰들이 와서 사람들을 괴롭히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부르면 여러 악귀가 악한 눈으로 보지도 못하겠거늘, 하물며 어찌 해칠 수 있겠느냐.


악귀의 난에 대한 설명입니다.

삼천대천국토에 가득 찼다는 말은 온 세상에 송곳 꽂을 틈도 없이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많은 야차와 나찰들이 수시로 찾아와 괴롭히려든다는 말입니다.

야차와 나찰은 결코 기분 좋은 상대가 아닙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야차에 대해서 사람을 잡아먹는 난폭한 귀신이라는 부정적인 설명과 함께 팔부신중의 하나로서 착한 이들을 수호하는 신이라는 긍정적인 내용의 설명이 실려 있습니다.
야차와 나찰같은 악귀들은 평소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할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무엇인가를 이루려할 때, 자원봉사나 선행을 하다가 왠지 자꾸만 힘들어질 때, 기도가 막 무르익을 때, 수행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 바로 이때 악귀들은 ‘귀신같이’ 알고서 우리 주위에 나타납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니 마장(魔障)이니 하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닙니다.
역사상 가장 가혹하고 극렬한 악귀들의 공격을 받은 이는 누구일까요? 뭐니뭐니해도 우리들의 부처님이 아닐까 합니다. 출가를 위해 막 성문을 나선 순간부터 악귀들의 유혹은 시작됩니다.

“이보시오, 태자. 어서 돌아가시오. 7일만 기다리면 온 세상이 당신 손에 들어가오. 그 제왕의 자리를 지금 포기하려는 게요?”

이보다 더 달콤한 유혹이 있을까요? 온 세상이 내 것이 된다지 않습니까? 하지만 싯달타는 대답합니다.

“나는 일만 세계에 이름을 떨칠 부처가 될 것이니 왕위는 필요 없다.”
위엄이 넘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한 싯달타의 대답에 자존심 상한 악귀는 분을 참지 못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네가 한 찰나라도 탐욕이나 분노,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는 순간 나타나 너를 무릎 꿇리고야 말리라.”

과연 성불하기까지의 6년 세월동안 악귀는 잠시도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좬숫타니파타좭나 좬니다나카타좭에 보면 악귀들의 공격은 절정에 달합니다. 달랬다가 으름장을 놓았다가 다시 부드럽게 유혹하였다가 이도 저도 여의치 않으면 제 수하들을 다 불러와 공격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끝내 싯달타에게서 틈을 발견하지 못한 악마는 “마치 까마귀가 기름덩이처럼 보이는 바위를 빙빙 돌며 뭔가 맛난 것이 있지나 않을까 탐색하다가 끝내 아무런 소득 없이 날아가듯이, 또 집게를 치켜들고 나선 게가 마을 아이들에게 막대기나 돌덩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주 멀리멀리 떠나갔습니다. 나찰과 야차가 환골탈태하여 삼보를 호위하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스스로의 수행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친 부처님에 비해 우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이제 막 면허를 딴 초보운전자가 폐차 직전인 자동차에 올라탄 격입니다. 초행길인데다 날도 저물어 어둑합니다. 내 ‘마음’이라는 자동차는 지금 선(善)과 악(惡)의 갈림길에, 정(正)과 사(邪)의 기로에 서있는데 방향표시등은 자꾸만 악과 사의 방향으로 깜박이고 있습니다. 설상가상 벌써 그 길을 타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뭔가에 홀렸는지 악과 사라는 글씨가 선과 정이라고 헛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염려 말고 관세음보살을 큰소리로 부르며 의지하십시오. 어느 곳에선가 반드시 U턴할 수 있는 표지를 발견할 것입니다. 나찰과 아귀의 눈홀림을 벗어나 이정표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관세음보살님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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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람이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수갑과 쇠고랑에 손발이 채워지고 몸이 묶였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부르면 이것들이 다 끊어지고 풀어져 곧 벗어나리라.

가쇄난(枷鎖難)입니다. 신임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다 옥에 갇힌 춘향의 목에 채워진 형구를 가(枷)라고 부르고 죄인들의 몸과 몸을 잇는 형구를 쇄(鎖) 즉 쇠사슬이라고 부릅니다 (『관음의소』참고).

그런데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라는 말이 들어 있군요. 이 부분을 읽다보면 “어, 그래? 그럼 실컷 못된 짓이나 하며 살다가 정작 붙잡혀서 고초를 당하게 될 때면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만 하면 다 풀려난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게다가 『관무량수경』의 다음 구절을 읽을 때면 설마…하는 의혹은 절정을 이룹니다.

“오역죄와 십악업과 온갖 나쁜 짓을 저질러 지옥에 떨어져 오랜 겁을 두고 고통받는 하품하생(下品下生)인 사람이 죽어갈 때 선지식이 나타나 위로하고 설법하면서 염불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고통에 시달려 염불할 틈이 없다. 이때 선지식이 ‘네가 염불할 수 없거든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불러라’.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이 지성으로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이 공덕으로 한 번 부를 때마다 80억 겁의 생사 중죄가 소멸된다.”

하품하생은 이윽고 황금 연꽃 속에 담긴 채 극락세계에 태어나며 12겁 뒤에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의 설법을 듣고 비로소 보리심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죄 없는 이가 ‘관세음보살’이라고 외쳐서 풀려났다면 사필귀정이라며 박수를 치고 환영할 일이지만 죄가 있는 이까지도 그런 혜택을 받는다? 게다가 나도 가기 힘든 극락세계에 아미타불 이름을 열 번 외친 공덕으로 극악죄인이 연꽃을 타고 간다?

곰곰 생각하니 이건 좀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될 수 있으면 덜 먹고 덜 가지며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으려고 움츠리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 못된 사람들도 나와 다름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고백하자면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는 자리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사람들의 질문이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들도 저와 똑같은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든 대답을 하여 그 순간은 넘겼습니다만 좀 껄끄러운 감정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치 시험시간에 옆의 친구가 컨닝한다고 선생님께 이르려고 자기 시험지를 열심히 풀어갈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친구만을 지켜보는 초등학생 같은 내 자신을 말입니다. 『법구경』의 ‘남의 소를 세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결국 나는 나보다 못된 사람이 무거운 벌받기만을 바라느라 정작 내 자신이 해야할 일을 소홀히 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이 살면서 저질러온 죄악에 따른 무서운 과보를 일러줍니다. 하지만 형량을 내리고 처벌을 가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저울과 법전을 들고서 대법원을 상징하며 서 있는 정의의 여신이 아닙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일단 살려놓고 봅니다. 일단 풀어주고 봅니다. 일단 귀기울여 들어주고 봅니다.

악업을 지은 사람은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봐서 괴로울 것이요, 인과법의 원리에 따라 벌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너는 고생 좀 해야 되’, ‘그렇게 벌받을 줄 알았다’, ‘네 한 짓에 비해 벌이 가벼운 걸 다행으로 여겨라’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인과법에 무지한 채 못된 짓을 한 그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야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닮아야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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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구별은 중생 집착서 출발

 

개호(蓋護)라는 이는 중국 산양(山陽) 사람으로 옥에 갇혀 죽게 되었습니다. 사흘 낮 사흘 밤을 마음에 조금도 쉴 틈 없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렀더니 곧 관세음보살이 광명을 내어 그를 비추셨습니다. 이어 쇠사슬이 벗겨지고 옥문이 열려 광명을 찾아 그 곳을 떠나 이십 리를 갔더니 그제서야 광명이 멎었다고 합니다.(『응험전』, 『관음의소』에서 재인용)

1968년에 입적하신 금오(金烏) 대선사께서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1920년대 초기 금오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인 수월스님을 뵙고 지도를 받으려고 만주 봉천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땅에서 공교롭게도 스님은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결백을 주장 해보았지만 모진 고문만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찌된 일인지 러시아 경찰들은 고문을 멈추더니 옥에 가두어 놓고는 며칠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다가 마침 감옥에 들어온 한국인 한 명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이미 범인들은 붙잡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나를 석방시켜주지 않을까요?”

스님은 불안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나라 잃은 백성 한 사람의 목숨은 파리목숨과 다를 바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스님의 무죄를 내놓고 말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경찰의 입장에서는 공연히 말썽거리를 만드느니 그냥 감옥에서 죽게 버려 두는 것이 더 나았던 것입니다.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이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탈출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겠구나.’

스님은 그때부터 감옥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참선도 화두도 그만두고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구원만을 갈구하며 부지런히 염불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밤, 어떤 사람이 철창 밖에 나타나더니 쇠창살 두 개를 뽑고는 다시 꽂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사라진 뒤에 비몽사몽의 정신으로 스님은 그 쇠창살 두 개를 뽑고는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생활 속의 기도법』중에서, 일타스님 지음)

관세음보살이 죄인이나 무고한 사람에게 똑같이 구제의 손길을 내려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못 궁금해집니다.

‘죄는 자기 성품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네(罪無自性從心起)’라는 『천수경』의 구절을 떠올려봅시다. 자성(自性)이란 처음부터 영원토록 변함없는 독자적인 성질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인간들은 다섯 가지 근간(五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그중 첫 번째인 색온(色蘊)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요소들은 인연화합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원리인데 인간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해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게 하려고 강하게 집착을 가하고 철썩 같이 붙여서 영원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온에 더해진 집착-이것이 오취온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오취온의 인간에게 ‘아, 이것은 내 고유한 성품이다’라든가 ‘나는 이러저러해야만 한다’라고 고집부릴 구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런 인간이 어리석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도 ‘너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며 손가락질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오온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환히 비추어보는 관세음보살의 눈길에는 죄와 복, 선과 악의 차별은 사라졌습니다. 고정된 성품이 텅 비어버린 공성(空性)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며, 복을 지었다며 수시로 울고 웃는 중생들의 모습들이 결국은 진실한 세계와 하나가 되지 못한 불안한 집착의 표현임을 알기에 목이 터져라 불러대는 음성에 천 개의 손을 내밀 뿐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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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가 법보시 할 수 있어

 

보시를 해보셨습니까?

어떤 것들을 베푸셨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보시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일일 것입니다. 돈도 안 들고 그다지 힘도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에게 말 한 마디 건네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입술만 몇 번 달싹거리면 가능한 일이건만 아무래도 말은 그냥 말이 아니라 마음이 담기는 것인가 봅니다.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 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인간입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재물의 보시가 쉽습니다. 좀 아까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나에게는 또 생길 테니…’, ‘또 벌면 되지…’ 하는 마음이 들면 제법 큰돈도 흔쾌히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재물의 보시에는 마음이 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돈으로 때우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경멸하면서 재물을 베푸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까요. 이런 중생들의 얄팍한 마음을 눈치채셨는지 부처님은 재물로 보시할 때 여덟 가지를 알아야만 큰 공덕을 얻을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십니다. “때를 맞추어 보시하라. 신선하고 청결한 것을 보시하라. 자기 손으로 보시하라.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서원을 세워 보시하라. 과보를 바라서 보시해서는 안된다. 열반을 얻고자 보시하되 천상에 나기를 바라지 말라. 거룩한 복전에 보시할 것이요 어리석은 복전에 보시하지 말라. 중생에게 회향하는 마음으로 보시할 것이요 나만을 위해 보시하지 말라.”『증일아함경』 부처님의 가르침을 베푸는 일도 보시에 들어갑니다. 법의 보시라 불리는데 『미증유인연경』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보시하면 하루의 목숨을 구제하고, 귀중한 보배나 재물을 보시하면 한 생의 궁핍함을 구제하지만 그것은 다 집착만을 더할 뿐이다. 법을 설하여 교화하는 것을 법시(法施)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도를 벗어나게 한다.”

『지도론』에서는 법의 보시가 재물의 보시보다 더 훌륭한 이유를 자세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재물의 보시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할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오직 보시한 사람만이 복을 얻을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보시한 사람과 보시 받은 사람이 함께 이익이 되기 때문이요, (중략) 재물의 보시는 탐욕과 질병을 불어나게 할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삼독을 다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의 보시는 출가스님들이 재가신자에게 베푸는 설법을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재가불자의 신분으로 크고 작은 법회에서 함께 경전을 읽는다거나 좋은 글귀를 소개해주는 일도 법의 보시라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역 벽에 붙여진 풍경소리는 물론이요, 고운 목소리로 찬불가를 불러서 사람들에게 감흥과 아울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도 참 훌륭한 법의 보시입니다. 그렇다고 재물을 감추어 두고 오직 경전 읽기에만 탐닉해서는 안됩니다. 『지도론』은 다시 이렇게 따끔하게 일침을 놓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으로 깨닫고 돈 한 푼을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돈 한 푼이라도 남에게 보시하는 일이 미혹한 마음으로 백천만 권의 경전을 읽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해(解)와 행(行)에 뜻을 두라고 가르침을 베푸신 것이다.”

요즘 주변에는 이론을 앞세워 머리만 커진 불교인이 눈에 뜨입니다. 출세간의 교리만이 전부가 아니라 세간을 착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불자의 기본자세라는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 그러면 관세음보살은 우리에게 어떤 보시를 베푸실까요? 재물의 보시? 법의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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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직시할 때 두려움 극복된다

 

만일 또 삼천 대천 국토에 도둑이 가득 찬 속을 한 상인의 우두머리가 여러 상인을 이끌고 귀중한 보물을 가진 채 험한 길을 지나갈 때,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선남자들이여, 무서워말고 두려워 말라. 그대들은 진심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를지니라. 이 보살이 능히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리니, 그대들이 이 이름을 부르면 이 도둑들을 무사히 벗어나리라’하고, 이에 여러 상인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소리를 내어 ‘나무 관세음보살’ 하니 곧 그 난을 벗어났느리라. 무진의야, 관세음보살마하살의 위신력이 이와 같이 훌륭하니라.

도둑의 난 즉 원적난(怨賊難)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경전의 문구 중 ‘도둑’이란 말은 한문본에는 ‘원적(怨賊)’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태 지의대사는 좬관음의소좭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원수의 재난은 정도가 무겁다. 도적이란 본래 재물을 구하고, 원수는 목숨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원수가 도적이 되었으니 반드시 재물과 목숨의 두 가지를 아울러 도모하게 될 것이다. 만약 과거에 피를 흘리고 싸운 일이 있으면 ‘원수(怨)’라 부르며, 현재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도적(賊)’이라 부른다.”

그러니 그저 재산만을 노리는 도둑이 아니라 재산은 물론이요, 내 목숨까지 노리는 흉흉한 날강도들이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속을 귀중한 보물을 지니고 지나간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못 즐거울 여행길이지만 도처에 강도가 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득 차 올라 한 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정작 도둑을 만나기도 전에 두려움이 내 목을 조르는 것입니다. 결국 내 재산을 빼앗고 내 목숨을 빼앗는 자는 도둑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번져 나오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것은 외부의 대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느낌입니다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죽음 즉 자기 존재의 사라짐, 소멸, 무화(無化)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저 험난한 길 어느 굽이에 도둑이 숨어서 내 목숨을 노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여 갖게 되는 두려움은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두려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불교기본교육 시간에 보살님들에게 제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한번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보시겠습니까?”
일주일 뒤에 만나서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답은 “내가 죽으면 자식들이 불쌍해서…”, “남편이 어떻게 살지 걱정이 되더군요”, “죽기 전에 살림살이 정리는 해놓아야 할텐데…”라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대답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삶을 생각한 셈이 되었지요. 죽음을 살짝 비켜선 채 자신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지를 생각하는 대답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 어떤 노보살님이 손사래를 치면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아휴, 난 생각하기 싫어…”
“왜 그렇지요?”
“죽음을 생각하니 갑자기 무서워졌어.”

연세 지긋하신 노보살님의 이 대답은 참 오래도록 저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처럼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죽음을 똑바로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것이 바로 두려움인 것입니다. 좬보문품좭에서 상인 중에 한 사람이 “무서워말고 두려워 말라”라고 말한 대목은 그런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낼 비법을 담고 있는 바코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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