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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2> 중생의 아픔 곧 내 고통...32相 나투어 구제하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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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삼악도의 괴로움을 받는 중생이 나를 생각하고 나의 이름을 부르면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로 듣고 살펴보겠습니다.”
자비로운 연꽃이라는 이름의 경인 『비화경』에서 이렇게 서원한 청년에게 보장(寶藏)부처님은 예언을 하십니다.
“너는 모든 중생들을 관찰하여 온갖 괴로움을 끊게 할 것이니 나는 너를 관세음이라 부르리라.”

갓난아이는 배고프거나 아프거나 불편하면 울음으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온통 아이에게 쏠려 있습니다. 아이가 뒤척이거나 꿈이라도 꾸는지 칭얼거리면 어머니는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눈을 뜹니다.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 평소와 조금 다른 숨소리도 어머니에게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거친 신음소리로 들립니다.

혹시라도 아이와 다른 방에서 잠이 들었을 때에 어머니의 신경은 더욱 예민해집니다. 잠이 든 어머니는 눈과 귀와 코의 활동을 쉬고 있는 듯 보이는데 어떻게 아이의 가녀린 숨소리 하나에도 퍼뜩 눈을 뜨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세상의 소리를 본다[觀世音]는 뜻을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세상의 소리라는 것은 힘들어하는 중생의 신음, 투정, 구원의 외침일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가 지금 힘들고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쾌락에 젖어서 맘껏 질러대는 환호성까지도 그 속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소리 속에는 중생의 괴롭거나 즐거운 상태가 담겨 있으니 결국 소리를 본다는 것은 단지 귀로 소리를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명체의 상태를 두루 살펴본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세상을 향해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이가 어디 인간들뿐이겠습니까? 작은 벌레들 중에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녀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관세음보살은 그 몸도 하나의 모습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종류만큼이나 관세음보살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속담에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형편이 되어야지만 상대방의 아픈 마음을 속속들이 내 아픔처럼 느낀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아프고 힘들어하는 이의 상태에 스스로를 맞추어 가면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분이 관세음보살이며 무려 32가지의 모습으로 변화무쌍하게 자신을 바꾸어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 때문입니다.

『증일아함경』고락품(苦樂品)에서 부처님은 이 세상의 중생들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몸은 즐겁지만 마음은 즐겁지 않은 부류, 두 번째는 마음은 즐겁지만 몸은 즐겁지 않은 부류, 세 번째는 마음도 즐겁지 않고 몸도 즐겁지 않은 부류,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몸도 즐겁고 마음도 즐거운 부류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복을 지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이 넉넉하지만 마음 공부를 하지 않아서 삼악도의 세계를 면할 길이 없는 이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번뇌를 끊으려고 열심히 수행하여 아라한은 이루었지만 공덕을 짓지 않아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남에게 빌려야만 하는 이들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공덕을 짓지 않아 지금의 삶에서 의식주가 항상 빠듯하고 게다가 삼악도의 길을 면하지도 못한 부류입니다. 네 번째 부류는 공덕을 지은 아라한이니 의식주도 넉넉하고 삼악도의 길도 면한 부류입니다.

당신은 몇 번째 부류에 속하십니까? 만약 앞의 세 가지 중에 하나에 속한다면 당신은 분명 세상의 소리를 관찰하는 관세음보살의 레이더에 포착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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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여러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곧 그 음성을 듣고 모두 벗어나게 해 주느니라.”

부처님은 가장 먼저 ‘관세음’의 뜻을 풀이해주신 뒤에 이어서 중생들이 어떤 고통, 어떤 어려움에 놓여있는지 그 예를 하나하나 들면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십니다. 괴로움을 겪는 중생이 자신을 부르면 그들을 구제해주기 때문에 ‘관세음’이라고 부른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답은 참 명쾌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눈길을 끄는 대목이 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괴로움을 받을 때’라는 부분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힘들 때 부르면 구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만, 관세음보살은 우리들의 모든 일에 다 구원의 손길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어떤 힘든 상황이 닥쳤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가장 먼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닥쳤을까?”
원인, 이유를 찾는 것은 생각하는 자의 본능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던 일이 착하고 올바른 일이었는지를 가장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려던 그 일이 올바른 행복을 추구하던 일이었을까?”
그 일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고 많은 이들의 행복을 좇던 일이었다고 생각되면 이제 할 수 있는 한 가장 착하고 올바른 방법을 강구해서 극복해야 합니다. 여기서 착한 방법이란 착한 업을 지어서 즐거운 과보를 불러오는 일입니다. 내 한 몸 편해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나보다 약한 자를 억누르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나쁜 방법입니다. 악업(惡業)이란 뜻이지요. 나보다 약한 자들도 나와 똑같이 행복해지고 싶고 즐거워지고 싶은 생명체인데 어찌 나 하나 편하고 즐겁자고 그들을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것은 누구나 즐겁기를 바란다. 그들을 괴롭히면서 자기의 즐거움을 구하는 자 그는 죽어서도 즐겁지 못하리라.『법구경』


올바른 방법이란 것은 이치에 비추어 보아서 정당하고 깨끗한 업을 지어서 떳떳한 과보를 불러오는 일일 것입니다. 쉽게 해결 보려면 편법을 쓰면 됩니다. 이간질하고, 뇌물을 주고, 속이면 일은 쉽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행위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팔정도 속에 바른 행위[正業]과 바른 직업[正命]이 들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착하고 올바른 행위를 하고, 착하고 올바른 방법을 취해서 문제를 뚫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일이 바람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오로지 한 마음으로 부르고 기억해내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라는 경전의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입니다. 한문본에는 ‘문시관세음보살(聞是觀世音菩薩),’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을 듣고’라고 하여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속에 여러 가지 내용을 넣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듣고…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뜻)을 듣고…

관세음보살(이 이러저러한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러고보니 지금 딱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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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중국 성지순례를 다녀온 한 보살님이 말했습니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중국 내에서 비행기로 이동하던 중에 엄청난 바람을 맞았지 뭡니까? 그 때 비행기가 어찌나 심하게 흔들리던지 똑 이대로 한국땅도 못 밟고 죽는구나 싶었습니다.”

간신히 비행기는 목적지에 착륙했고 승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서둘러 그 비행기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지를 밟고 나니 그제서야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생각난 그것, 그것은 바로 ‘관세음보살’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극한상황에 빠지면 판단이 멈추어버리고 맙니다. 웬만한 이성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공황상태에 빠져서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하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를 구제해주실 분이라고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정작 다급할 때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는 평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교에서는 ‘무조건 믿어라’라는 말하기를 좀 꺼려합니다. 부처님부터가 스스로 머리와 가슴으로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서 진리를 찾아냈으며, 그 분의 유언도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지침서가 되고 나침반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과 이성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인과법칙에 충실하고 겸손과 양보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은 그런 인과법칙보다 앞서거나 무시하고 번복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인과법칙을 굳게 디디고 선 뒤에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믿음인 것입니다.

옛날 사위국 동남쪽에 깊고도 넓은 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저 힘센 것만 바라고 남속이기를 일삼으며 이익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일깨워야겠다고 생각한 부처님께서 그 강가의 어떤 나무 밑에 가 앉으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반듯하고 티없는 부처님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숙연한 마음이 들어 절하였습니다.

곧이어 부처님은 그들에게 법을 펼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게으름과 쾌락에 이미 젖어있던 터라 성현의 말씀을 듣기는 듣되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부처님도 금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교화하기 어려운 이들에게는 궁여지책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지요. 결국 부처님은 사람 하나를 만들어내어 강의 남쪽으로부터 물위를 걸어오게 하셨습니다. 그가 부처님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와서 절을 올리자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습니다.

“당신 누구요? 대체 무슨 신통을 지녔기에 물위를 걸어도 빠지지 않는게요?”
변화로 만들어진 사람이 답하였습니다.

“나는 강 남쪽에 사는 범부요. 부처님을 뵙고 싶었지만 강을 건널 수가 없었소. 그래서 강가에 있는 사람에게 수심을 물었더니 ‘복숭아뼈 정도밖에 차지 않는데 왜 건너지 않소?’라고 대답하셨소. 나는 그 말을 믿고 곧 그대로 건너왔을 뿐 다른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과 정성만 가졌다면 생사의 깊은 못도 건널 수 있는데 몇 리의 강을 건넌 것이 무엇이 그리 신기한가?”『법구비유경』 제1권 독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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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정성만 가졌다면 생사의 깊은 못도 건널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관세음보살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한 마음으로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이름을 부른다.”

그 유명한 일심칭명(一心稱名)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불자들에게 왜 불교를 믿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의 대부분은 “내 마음을 찾기 위해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모든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경에는 마음에 대해 다양한 가르침을 주고 있지만 제 눈길을 끄는 구절은 좬증일아함경좭 제4권의 말씀입니다.

“나는 마음보다 빠른 어떤 법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다.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탈 때 나뭇가지 하나를 놓으면 순간 다른 가지 하나를 얼른 잡는 것처럼 마음도 이와 같아서 앞생각과 뒷생각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어떤 방편으로도 모색할 수 없다. 마음은 정말 재빠르게 돌아다닌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항복받아서 착한 길로 나아가도록 공부해야 한다.”

나무를 타고 노니는 원숭이처럼 마음은 경계를 놓지 못합니다. 우리들 중생은 1초라도 마음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마음에 뭔가를 그려놓거나 무엇인가에 마음을 붙들리고 있습니다.

법회 시작할 때에 언제나 입정(入定) 시간이 있습니다. 대체로 1분을 넘지 못하는 매우 짧은 순간이지요. 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입정 시간에 무슨 생각하셨습니까?”
정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대답을 못합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이 오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생각은 이렇게 분주합니다. 그런데 좥보문품좦에서는 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라고 주문합니다.

천태대사 지의 스님은 『관음의소(觀音義疏)』에서 한마음을 일[事]과 이치[理]의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만약 마음에 한 생각을 두고 생각생각이 계속 이어지면 다른 마음이 그 사이에 생기지 않으므로 한마음이라 부른다. (중략) 한 마음으로 귀의하고 기대어서 다시 다른 생각이 없는 것이다.”(일의 측면에서 본 한마음)

“마음은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통달하여 마음도 없고 생각도 없는 공의 지혜(空慧)와 상응하게 되면 이것은 곧 하나[一]라는 관념도 없고 마음이란 관념도 없게 된다. 소리의 모습이 공(空)임을 알게 되고 부르고 메아리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부르는 주체나 불리는 대상 모두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니 이것을 무칭(無稱)이라 한다.”(이치의 측면에서 본 한마음)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주인공임을 감안해보면 모든 것이 공(空)한 이치를 들어서 일심칭명을 설명하는 지의스님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잡념도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오로지 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할 시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날 살려줄까?’ ‘혹시 구제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불러나 볼까?’ ‘아직은 견딜 만 하니 조금 있어본 뒤에 칭명해야겠다.’

이런 여유를 부릴 시간 없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다급한 그 순간 오직 관세음보살을 떠올리며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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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어떤 이가 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받들면, 그가 혹시 큰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위신력 때문이며, 혹은 큰 물에 떠내려가게 되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되며,『보문품』에는 불, 물, 바람, 무기, 악귀, 형벌, 도둑이라는 일곱 가지 재난을 들고 있습니다. 뭇 생명체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들이지요. 그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재난입니다.

큰 불을 만나도 큰 물을 만나도 살아날 수 있다는 이 대목에서 저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아직까지 그런대로 평탄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저로서는 이처럼 기적같이 벌어지는 구제의 손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현들의 말씀을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천태대사 지의 스님은 『관음의소』에서 불에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우주가 파괴될 때 즉 괴겁(壞劫)일 때 위로는 초선천에서 아래로는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워버리는 과보의 불, 온갖 선근을 태워버리는 분노와 같은 악업의 불, 수행하는 사람들이 각 단계마다 부딪치는 미혹 등의 번뇌의 불입니다. 물에 대해서도 똑같은 세 종류를 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 순간에도, 오롯하게 수행하다 마주치고만 마장(魔障)의 순간에도 관세음보살을 소리높여 부르면 그 불길을 꺼주고 우리를 구제해준다는 설명입니다.

대은 스님은 『관음성전(觀音聖典)』에서 “(큰 불이란) 인간의 마음속 불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번뇌의 불’이다.(중략) 큰 물이란 사람의 마음 속 물을 말하는 것이니 ‘탐애의 불’이다”라고 풀이하였습니다.

큰 불과 큰 물이 마음속의 번뇌 즉 분노와 탐욕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얼핏 보면 참 명쾌해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요?

두 눈 질끈 감으면 사바가 곧 극락이라는 식의 거침없는 웅변으로 좥보문품좦의 이 대목을 설명해도 좋을 것일까...

게다가 『보문품』을 조금더 읽어보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시달릴 때도 구제받는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같은 내용을 구태여 이렇게 반복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저는 법령스님의 『보문품강화』에서 좀더 피부에 와닿는 설명을 얻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어릴 때부터 세상 모든 것은 다 불에 타기 마련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나 자신도 불길에 휩싸이면 타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정관념을 바꾸어서 불에 타지 않는 도리를 체득할 때까지, ‘불이 능히 태우지 못한다’라는 사실이 고정관념이 될 때까지 계속 관세음보살을 일심칭명해야 한다고 법령스님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불이 덮치거나 큰 물에 휩쓸리면 죽음의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평정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물에도 사람은 해를 입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신을 무장시킬 때까지 우리는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해야 한다고 관음행자들은 강조합니다.

불교는 더없이 세밀하고 미묘한 마음 경지를 풀어주는 고차원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큰 불과 큰 물의 재난은 마음속의 불길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접 만나는 재앙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재로 보금자리가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홍수로 인해 가족과 온 재산이 휩쓸려가는 그런 재앙…… 그러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에 자꾸만 마음이 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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