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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3> 간절한 기도와 지극한 믿음으로 모든 환란과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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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晋)나라 때 축장서라는 스님의 일입니다. 낙양에서 화재가 일어나 자기 집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초가집인데다 아래로 내려 부는 바람결이라 불길을 면할 길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더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불길은 잡혔다고 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다’라고 수근대며 정말 관세음보살이 불을 꺼주었는지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바람불고 건조한 다른 날에 그의 집에 불방망이를 던져 넣었습니다. 세 차례나 시도하였지만 불은 세 번 모두 꺼졌고 사람들은 그제야 참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법력이란 스님은 길을 가다 피곤하여 들판에 몸을 누이고 잠시 잠에 빠졌는데 마침 들불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놀라서 깨어났지만 불은 이미 스님을 덮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곧 소리높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려고 하였습니다. 스님이 ‘관’이라고 외치자마자 ‘세음’이란 소리를 내기도 전에 불은 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좥관세음응험전(觀世音應驗傳)좦, 좬관음의소좭에서 재인용) 과학과 논리를 중시하는 오늘날 이런 영험담들은 그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지어낸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독한 불길 속에서도 목숨을 건졌던 이들의 체험담을 우리는 웃어넘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응험(應驗)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숱한 이들에게도 구제의 실례(實例)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시 중국의 일입니다만 명나라 때 곤산(昆山) 고을에 왕(王) 씨라는 장사아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목욕재계하고 좥보문품좦을 읽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관음도량인 보타산으로 가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자 원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보타산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배를 타고 막 떠나려던 참에 급보가 날아들었습니다. 그의 동네에 불이 났는데 그의 가게로까지 옮겨 붙게 되었다는 소식이지요.

‘돌아가야되나…’
하지만 왕씨는 결심했습니다.

“내가 보타산에 계신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고 정성을 쌓아온 지 3년 만에 길을 떠나는데 내 어찌 가게 한 채의 화재로 뜻을 바꿀 수 있으랴.”

결국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보타산으로 떠났습니다. 공양 예배를 잘 마치고 돌아와보니 그의 가게 주변은 다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게만은 화마를 면하고 우뚝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왕씨를 따라 관음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법령 지음, 『보문품 강화』에서)진지하고 치열한 구도열은 화마까지도 잠재울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영험담입니다.

이 영험담에 등장하는 보타산에 주목해 주십시오.

보타산은 남인도의 바닷가에 위치한 산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께서 머물고 계시는 성스러운 땅이지요. 스리랑카와 같은 외국으로 무역을 하려면 이 근처에서 배를 타야만 했던 당시 상인들, 그리고 상인들과 짐을 싣고서 그 너른 바닷길을 열어가야 하는 뱃사람들은 출항하기에 앞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들은 항해를 하는 동안 마음 속 깊이 관세음보살을 새기며 무사귀환을 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무사귀환을 빌었습니다. 이렇게 바닷가에 위치하였다는 지리적인 특징으로 인해 관세음보살은 유달리 바다, 또는 물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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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이 상주하심을 잊지말라

 

아주 먼 옛날 바다 한 가운데 실론섬에는 여자나찰(나찰녀)들이 살고 있는 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조난당한 상인들이 파도에 쓸려오면 아름답게 차려입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들고 그들에게 접근합니다.

“우리는 남편들이 바다로 나갔다가 모두 숨진 바람에 외롭게 지내는 여자들이랍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오셨으니 이제 우리 마음으로 의지하며 지냅시다.”

조난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상인들에게는 꿈과 같은 유혹의 손길입니다. 상인들은 그 여자들이 나찰귀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함께 어울려 온갖 쾌락에 젖어 지냅니다. 그러다 새로운 상인들이 조난당해 그들의 성으로 밀려오면 나찰녀들은 지금까지 함께 지내던 상인들은 감옥에 가두고 한 명씩 잡아먹으면서 새로운 상인들을 유혹하며 지내는 것입니다.

어느 날 5백 명의 상인들이 조난을 당해 이곳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나찰녀들은 서둘러 옛 상인들을 가둔 뒤에 그들을 유혹하여 남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나찰녀들은 몰래 옛 상인들을 한 명씩 잡아먹었습니다. 사람고기를 먹은 나찰녀들의 몸은 차가웠고 마침내 상인들의 우두머리가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나찰귀가 이 여자들이구나. 어서 도망쳐야겠다.’

상인의 우두머리는 어떻게 해서든 벗어날 궁리를 하였지만 바다 한 가운데의 성에서 도망칠 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간절하면 하늘에라도 닿는 것일까요?

마침 온 몸이 새하얀 백마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 말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 양식을 먹고는 돌아갈 즈음에는 항상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인간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자가 있는가?”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음성을 기적적으로 들은 상인들은 그 말에 올라타고 무사히 나찰녀의 성을 빠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리며 남기를 원했던 일부 상인들은 끝내 나찰녀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쟈타카』 196번째 이야기)상인들을 구한 눈부시게 흰말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입니다. 그와 아주 똑같은 이야기가 「보문품」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관세음보살이 부처님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혹은 백천만억 중생이 금·은·유리·자거·마노·산호·호박·진주같은 보배를 구하려고 큰 바다에 들어갔을 때, 가령 폭풍이 일어 그들의 배가 나찰귀들의 나라에 닿게 되었을지라도 그 가운데 만일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여러 사람들이 다 나찰의 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니,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이라 이름하느니라.

나찰(羅刹)은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거나 시체를 뜯어먹고 사는 귀신입니다. 『관음의소』에서는 나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의 심장에는 일곱 방울의 단 물이 있어서 사람의 정신을 고르게 길러내는데 귀신이 한 방울을 빨아먹으면 사람의 머리가 아파진다. 세 방울을 빨아먹으면 기절하고 일곱 방울 다 빨아먹으면 곧 죽게 된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건, 돈벌려고 나선 사람이건 누구든지 나찰의 아귀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찰은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옥죄어옵니다.

그러면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자신의 위험을 빨리 알아채고 간절하게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누구든 한 사람이라도 현명하게 구원을 요청하면 관세음보살은 백마의 몸으로라도 변하여 위험에 처한 사람 모두를 구해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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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의 일곱 보물 얻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바람이 붑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흔들어대는 그 바람은 이익, 쇠퇴, 비방, 명예, 칭송, 비난, 괴로움, 즐거움의 여덟 가지 바람입니다. 나찰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유혹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람에 휘말려 정신을 잃고 쓸려 다니지만 수행자는 안간힘을 쓰면서 중심을 잡습니다. 그럴 때 나찰은 수행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렇게 유혹합니다.

“계율쯤은 조금 어겨도 돼.”
“내일도 있잖아. 잠시 쉬고 맘껏 즐겨봐.”
하지만 수행자는 그럴수록 다짐합니다.
‘절대 넘어가면 안돼.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돼.’

왜냐하면 이 바람만 잘 넘으면 보물이 수행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보물을 갖기만 하면 수행자는 성현이 되는 것입니다.

보물을 찾으러 나갔다가 바람의 재난을 맞아 나찰의 유혹에 빠진 상인들의 이야기는 좬대반열반경좭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부에게나 수행자에게나 이 세상이 고통의 바다인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어떤 이는 화려한 유람선에, 또 어떤 이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서 바람 부는 대로 바다를 흘러 다닙니다. 자신이 몸을 싣고 있는 배 안에서 기뻤다가 슬펐다가 노래했다가 분노하면서 일생을 보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수행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태어나서 살아가고 건너가야 할 바다라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뛰어들어야겠다고 결심하는 이들이 바로 수행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안전하다고 여기는 배 안에서 걱정스런 눈초리로 수행자를 지켜봅니다. 그들 중에는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구명조끼 하나만을 꺼내들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바다에는 쉬지 않고 파도가 입니다. 때로는 잔잔하다가 때로는 산더미처럼 제 몸을 번쩍 치켜들고서 수행자를 향해 덤벼듭니다. 해일이 곳곳에서 일고 있습니다. 이런 바다에서 외롭게 구명조끼에 의지해 헤엄을 치고 있는 수행자 앞에 나찰은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그 구명조끼를 나에게 주면 널 편안하게 해줄게.”
“그럴 수 없다.”
나찰은 계속 졸라댑니다.
“통째 주기가 싫으면 손바닥만큼이라도 잘라다오.”
“네가 달라는 것은 적은 양이지만 내게는 목숨이 달린 물건이다. 그러니 줄 수 없다.”

나찰은 끈질기게 수행자에게 달라붙습니다.

“내 말만 들으면 쉽게 열반에 가는 방법도 알려줄 수 있어.”
“그거 한 조각만 날 주면 넌 아주 즐거워질 수도 있을 거야.”

이렇게 번뇌를 상징하는 나찰귀가 수행자를 유혹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도리질합니다.
보물을 찾아 바다로 나선 『보문품』의 장사꾼들을 『대반열반경』에서는 거친 바다에 뛰어든 수행자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나운 바람을 마음 굳게 잘 헤쳐온 사람만이 챙길 수 있는 든든한 보물은 바로 믿음, 계율, 부끄러움, 수줍음, 많이 앎, 지혜, 버림이라는 일곱 가지 덕목입니다. 성현의 칠재(七財)이지요. 이 보물만 있으면 이번 생은 물론이요, 영원히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니, 이제 슬슬 보물을 캐러 나서보지 않겠습니까? 구명조끼는 반드시 챙기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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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업의 윤회는 깊어지기만 하리

 

또 어떤 사람이 만일 해를 입게 되었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이 가진 칼이나 막대기가 곧 조각조각 부서져 능히 벗어날 수 있으며


『보문품』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재난(七難) 가운데 무기의 재난 즉 도장난(刀杖難)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남에게서 해를 입지 않고 평생 지내기란 참 어렵습니다. 크든 작든 나는 남에게 해를 입히고 남도 나에게 해를 입힙니다. 그런데 해를 당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는 대체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억울해하고 분노하며 당장 똑같은 무기를 들고나서는 반응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맞서 싸울 힘이 없어 그냥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더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는데 이 정도에서 그치니 고맙다’라며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입니다.

첫 번째 경우의 사람들은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너는 나한테 잘 했니?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하는 법이야. 너도 한번 당해봐.”

그리고 자기가 맞았던 매와 똑같거나 그보다 더 큰 흉기를 집어듭니다.
어느 마을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미안한 마음에 다른 여인을 남편과 맺어주었고 그리하여 한 집안에 남편 한 사람과 두 명의 아내가 함께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 집에 살아가다보니 첫째 부인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안방을 내주고는 하녀 신세가 되고 말 거야.’

불안을 떨치지 못하던 첫째 부인은 둘째 부인의 임신을 방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두 번째 임신까지는 용케 낙태를 시켰는데 세 번째 출산 때에는 산모와 아기가 둘 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둘째 부인은 죽어가면서 한없는 원한을 품었고, 남편도 결국 첫째 부인의 잔인한 행실을 알아채고는 모질게 매질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두 여인은 태어날 때마다 원수지간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죽은 첫째 부인은 암탉으로, 둘째 부인은 고양이로 태어나서 이번에는 암탉의 알을 고양이가 모조리 먹어치웠고, 암탉은 표범으로 고양이는 사슴으로 태어나서 이번에는 표범이 사슴을 잡아먹고… 나고 죽는 그 긴 윤회 속에서 이들의 원한은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발톱과 이빨은 모조리 흉기였고 손에 든 것 역시도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무기였을 뿐입니다. 이 두 사람의 끝없는 전쟁을 보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유명한『법구경』의 노래입니다.


실로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을 풀 수는 없네.

오직 용기로써만 그것을 풀 수 있으니

이것이 영원한 진리라네.(『법구경』게송 5)


지금 당신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상해까지 입었다면 당장에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들고서 고함치며 달려들기보다는 잠시 그 상태에서 멈추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이 그 원인을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힘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고 바로잡을 수 없다면 내 마음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원한이라도 가라앉혀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보문품』의 도장난은 너무나도 억울하게 당하였을 때, 분연히 정의롭게 맞서 싸울 수도 없을 때, 그리고 잘못의 시초는 나에게 있지만 지금 내 피해가 너무 커서 목숨이 위태로울 때 기억해야 할 이름이 관세음보살임을 일러주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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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업을 다시 짓지 않으리라

 

 

데바닷타는 부처님에게 엄격한 규율을 승단에 철저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갓 들어온 비구승 5백 명을 이끌고 나가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서 부처님에게 덤벼들게 한다던가 언덕 위에서 바위를 굴리기도 하였습니다. 코끼리는 바다처럼 깊고 고요한 부처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질주를 멈추었지만 마음이 없는 바위는 부처님 몸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내용만 조금 달리한다면 이런 일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음직한 일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처님은 우리들 범부와 그리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이 몸은 서서히 달라져갑니다. 새카맣던 머리칼에는 흰빛이 서리고 팽팽하던 피부는 탄력을 잃습니다. 이런저런 병마들이 공격을 해오면 젊어서는 하룻밤 자고 나면 가뿐하게 일어났지만 나이 들어서는 병석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합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며, 억울하게 남에게 상해를 입고, 비웃음도 당합니다. 부처님과 우리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첫 번째 화살이라고 불러봅시다. 화살은 첫 번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곧이어 두 번째 화살이 우리에게 날아듭니다. 이때 부처님과 나에게서 차이가 벌어집니다. 부처님에게는 두 번째 화살이 날아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중생들은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면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런 뒤에는 곧 근심하고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고 울부짖고 원망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은 뒤에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지혜롭고 거룩한 성자는 감각기관으로 어떤 대상을 접촉하더라도 근심하거나 슬퍼하고 원망하거나 울부짖는 증세를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을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다.”(『잡아함경』 제17권 전경(箭經))

어떻게 하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전경』의 뒷부분을 보면 부처님은 몸의 느낌만 생길 뿐 생각의 느낌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아서 이 일이 자신의 지난 업에 따른 과보임을 안다면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하여 그런 증세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도 경전 곳곳에 보입니다. 이 두 가지에 완벽해진다면 두 번째 화살은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범부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상대가 의롭지 못한 공격을 해오면 나는 힘닿는 데까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세속의 이치입니다. 세상은 나의 ‘분명한 태도’를 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았어도 싸움에서 밀리면 세상은 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는 세상의 법칙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나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가능한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여 어느 정도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세속에서 ‘덜 손해보는 방법’인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으니 두 번째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두 번째 화살을 막아주는 방패입니다. 그렇다면 억울해하며 또다른 어리석은 악업을 짓지 말고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법다운 방패를 찾아보는 일이 관음행자의 자세일 것입니다.

“중국 진(晋)나라 때 고간이란 사람은 국범을 범하여 처형당하게 되었다. 벗어날 길이 없어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하였더니 족쇄와 사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칼을 내리쳐도 칼이 부러지며 목을 졸라도 오랏줄이 마디마디 끊어졌다.” 지의 스님의 좬관음의소좭에 실린 영험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