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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관세움보살보문품

★~ 관세음보살 보문품 <01> 시작 ~★

by 가릉빙가 200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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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작

 

 

 

 

 

 

 

지금부터 나는 당신과 함께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읽어가려 합니다. 아, 그런데 만일 당신이 다음 생에 극락 갈 밑천 두둑하게 마련하셨다면 굳이 아까운 시간을 내어 이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사람들 얼굴 속에서 부처님을 발견하고, 하는 일마다 큰 이익을 내며, 일가친척이 약속이나 한 듯 부자되고 승진하고 대학에 붙고 장수한다면 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크게 아파본 적도 없고, 혹시 수술을 해도 금방 회복되었으며, 자식들은 어쩌면 그리도 속 한번 안 썩히고 잘 살아주는지 절로 감탄이 나오시는 분, 혹시 지금 미군의 폭탄이 비처럼 퍼부어도 당신은 아무런 찰과상 하나 없이 그 속에서 살아남으리라고 자신하시는 분.... 이런 분들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살아온 삶의 갈피를 넘겨 보십시오.

아무리 뒤적거려보아도 무병장수하다 잠자듯 세상 떠난 어르신 안 계시고, 신통방통한 소식이라고는 가뭄에 콩 나는 일보다 더 드물고, 게다가 복권에 당첨된 적도, 의외의 보너스 받은 적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 역시도 당신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인과법칙에 가급적 맞추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뭔가 좀 이렇게 되었으면...”할 때 그 일이 척척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제발 저런 불행에는 걸려들지 말았으면...”할 때는 용케도 피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부처님법 만난 뒤에는, 앞 못 보는 거북이 바다 속에서 백년 만에 고개 내밀어 나뭇구멍에 머리 들이미는 행운을 잡은 거라며 위안주던 경전의 말씀에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였습니다[불설니리경]. 지옥에서 천상까지의 그 정신없이 뺑뺑이 도는 운명 속에서 인간의 몸을 만난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냐는 부처님 말씀에는 어깨를 으쓱거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환호성보다는 한숨이 더 자주 쉬어집니다. 분명히 저에게는 좋은 일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기억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제 가슴 속에는 슬펐던 일, 억울했던 일, 아팠던 일이 더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신문을 펼쳐보아도 숨막히는 일들뿐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의 내면에서 빚어지는 슬픔과 괴로움, 현실에서 부닥치는 위험과 병마, 가족간의 불화, 이 사회의 범죄, 그리고 또 하나의 불행으로 역사에 기록될 국가간의 전쟁들....

“세상이란 게 전쟁도 있고 평화도 있는 법이지...”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뭘...”

당신도 저도 그저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볼 뿐입니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 lmrcitta@hanmail.net )



이미령 님은 1982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 1993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좬원효, 법장의 기신론관 비교연구좭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이며, 광명 금강정사 교육원에서 기본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경전의 성립과 전개>, <붓다 그 삶과 사상>, <아함경>,<본생경>, <밀린다왕문경> <대당서역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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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삶의 위안 삼을수 있고 괴로움 없애주는 가르침

 

 

 

 

 

 

 

“내 마음 같지 않아.”
“힘들다.”

우리는 이런 말들을 아예 입에 달고 삽니다. 정말 우리의 삶에는 힘든 일이 참 많습니다.

일단 태어난 존재는 쉼 없이 죽음의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병마가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만남조차도 이별을 항상 그 속에 안고 있습니다. 나의 성공은 다른 이의 좌절을 의미합니다. 태어난 이상 겪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 부처님도 이 세계와 중생들을 거듭 살펴보시다 마침내 덧없고 괴롭고 진실한 나라고 할 수 없다며 땅! 땅! 땅! 결론을 내렸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괴로움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괴로운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괴롭고 슬픈 상태를 지속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나도 괴로움을 싫어합니다. 그 괴로움이 어떤 이유에서 빚어졌든 그리고 괴로움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무조건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생명 있는 자들의 본능입니다. 즐거운 것은 좋고 괴로운 것은 싫다는 것이 우리들 인간의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대반열반경』에는 삶은 좋아하면서 죽음은 꺼리는 ‘어리석은’ 인간을 따끔하게 일깨우는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삶, 생명, 환희,영원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공덕천이 문을 두드리자 집주인은 반색하며 맞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죽음, 슬픔, 고통을 상징하는 추한 모습의 흑암천이 집안을 기웃거렸습니다. 아연실색한 집주인은 호통을 쳤습니다.

“어디 감히 들어오려고 하느냐?”
그러자 아름다운 공덕천이 이렇게 참견하였습니다.
“흑암천은 내 동생입니다. 우리는 어디든 항상 함께 다니는 자매랍니다.”
“그래? 그럼 너도 내 집에서 나가거라.”
현명한 집주인은 공덕천마저도 내쫓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은 공덕천에 너무나 미련이 강해서 끝내 흑암천까지 집안으로 들인다는 내용입니다. 공덕천과 흑암천이 동전의 양면처럼, 손바닥과 손등처럼 뗄래야 뗄 수가 없고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인데 당신과 나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덕천이 잠시 내 눈 앞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면 넋을 잃고 빠져들다가 흑암천이 재채기라도 한번 하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중생인데요......
내가 부처님처럼 지혜롭다면 온갖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조금도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아직 지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지혜는커녕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만이 대글대글 내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불행해지는 것은 싫습니다. 아, 이런 모순덩어리가 또 어디 있을까요?

「관세음보살보문품」은 바로 이런 모순투성이의 중생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읽어가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에잇, 이깟 세상살이...!”하면서 속절없이 털어버리고 출가하여 용맹정진할 용기도 없고, 수행하면 될 줄 머릿속으로 알고는 있으면서도 게을러서 그리 하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 읽는 말씀입니다.

「보문품」은 위험에 처했을 때 읽는 경이 아니라 미리 읽어두어야 하는 경입니다. 그리하여 장롱 깊숙한 곳에 들어 있다가 위험이 닥친 순간 놀랄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는 보험증서처럼 당신과 나의 인생살이에 위안을 삼을 수 있고 괴로움을 무사히 건네주는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보문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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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법화경은 대승불교의 귀결지

 

 

깨달음 제시한 희망의 메시지

 

 

 

 

 

이때 무진의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째 앞머리가 뚝 잘려나간 기분이 들지요? 그건 바로 「관세음보살보문품」(앞으로는 보문품이라고 줄여서 말하겠습니다)이 하나의 독립된 경이 아니라 『묘법연화경』에 들어있는 한 품이기 때문입니다.

『묘법연화경』
이 경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그 동안 저는 『아함경』을 읽으면서 부처님이 마치 연필 쥔 제 손을 잡고 한 글자 한 글자 쓰기 연습을 시켜주던 초등학교 선생님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힘드냐?”
“예, 부처님.”
그럼 부처님은 저에게 자리를 권하셨습니다.
“여기 앉아 보아라. 이제 내가 너한테 이 세상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고 그 속에서 답답해하는 너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 존재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줄게.”
너무 어려워 지루한 표정을 지으면 부처님은 은근히 저를 나무라셨습니다.
이렇게 아함경 속에서 부처님은 때로는 짐짓 화도 내시고 따뜻한 어조로 달래주시면서 저를 어서 부처님 가르침의 문지방이라도 밟고 들어서게 하시려고 무던히도 애쓰셨습니다.

『아함경』을 건성으로나마 읽고 나서 반야 계통의 경을 펼치자니 부처님은 좀 냉정하게 바뀌셨습니다. 저더러 자꾸만 피안으로 건너가라고 채근하시기 때문입니다.

“자,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다음은요?”
이렇게 여쭈어보면 부처님은 도리어 저에게 되묻습니다.
“네가 건너왔다고? 어디서 건너왔는데? 그리고 건너온 이곳은 또 뭐라고 설명할래? 건너가고 건너온 너는 뭐지? 그게 끝이야?”
그리고는 자꾸만 “아니야, 아니야”라고 도리질하십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등떠밀려 가고 가고 또 가다보니 세상이 아주 밝고 환하고 또렷해졌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있다, 없다, 살아있다, 죽었다와 같은 상대적인 판단이 동시에 멈추자 그런 판단을 떠난 사사물물이 그대로 그 자리에서 환한 빛을 내고 있습니다.

반야의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힘들 때면 「보현행원품」도 읽고 『화엄경』도 읽습니다.

제 자신이 선재동자가 되어 화엄법계를 휘휘 휘젓고 다니면서 선지식들을 만나 그 품에서 쉬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선지식들은 저를 잠시 안고 다독여주다가 “여기가 끝이 아냐!”라며 품안에서 밀쳐냈습니다.

그 매몰찬 손짓…
53분의 큰 스승들은 한결같이 당신이 끝이 아니라면서 더 가라고 손짓을 할 뿐이었습니다. 화엄경 속에서 부처님은 그저 빛을 보이셨습니다. 그 빛을 통해서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실 뿐 저에게 더 이상 무슨 자세한 말씀을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하나요?
저는 어디에서 위안을 얻어야 하나요?
보살이 되라고 하셔서 보살의 마음이나마 가져봤지만 저는 힘들고 피곤하기만 합니다.
그냥 다 집어치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더럭 겁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대체 부처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신단 말씀입니까?
깊은 회한에 사무쳐 부처님을 향한 의심이 일어나려 할 때 제가 마지막으로 꺼내든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법화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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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보살은 지혜와 자비의 화신

 

 

무지의 바다 건네주는 다리

 

 

 

 

 

알고 계십니까? 내게도 불지견이 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도 『법화경』 속에서 부처님은 나의 아버지로 다가오십니다. 아함경에서는 친절한 선생님이셨고, 반야 계통의 경에서는 나를 제 성품도 없고 텅 빈 공성으로 인도하려는 조련사이셨고, 『화엄경』에서는 몸체가 없는 눈부신 빛이셨던 그 분이 알고보니 나와 당신의 진짜 아버지이셨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수행자들이 궁극적인 가르침이라 믿고 따랐던 그간의 모든 말씀들이 전부 방편에 불과하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법회에 참석해 있던 대중 가운데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가자 부처님은 의외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가지와 잎사귀는 다 떠나고 열매만이 남아있구나.”『법화경』 『방편품』교만한 사람은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저에게도 당신과 똑같은 지혜가 있음을 알려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저더러 아라한에 만족하지 말고 보살에도 만족하지 말라시며 제가 가야할 길은 궁극적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일러주시러 오셨습니다.

전부해서 28품으로 이루어진 『법화경』은 이런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불이 난 집에서 자식들을 구해낸 이야기좥『비유품』, 가난한 아들이 부자 아버지를 찾은 이야기『신해품』, 산천초목에 고루 내리는 비 이야기『약초유품』, 마술로 만들어낸 성(城) 이야기『화성유품』, 제 옷 속에 보물을 품고도 알지 못해 고생한 남자 이야기『오백제자수기품』, 독약 먹은 아이를 살려내는 의사 이야기『여래수량품』가 그것입니다.

한결같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지견)가 있음을 알지 못해 헤매고 고통받는 우리들 중생을 불쌍히 여겨 구제하려고 애쓰는 부처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좥보문품좦은 이런 이야기들이 끝난 뒤에 등장하는 품입니다.

얼핏 보아서『법화경』의 구성이 조금 매끄럽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법화경의 성립과 구성에 대해서 다양한 학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법화경』은 기원전 1세기경에 성립되었다, 기원후 40년경에 성립되었다, 심지어는 기원후 220년 이후에 성립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총 28품 가운데 앞의 20품까지가 본래의 『법화경』 내용이고 뒷부분은 나중에 첨가되었다는 학설도 매우 유력합니다.

하지만 구구한 학설들은 잠시 접어두고라도 중생들에게 부처님과 같은 지견이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법화경』속에 『보문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나는 중생이야. 이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래, 말로는 불성이 있느니, 여래장이니 하지만 사실 어떻게 이런 내가 성불할 수 있겠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말이야!”
『법화경』을 통해서 부처님이 아무리 목이 쉬어라 일러주셔도 애초부터 자포자기한 우리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중생들을 보다 못해 결국 부처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셨습니다.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들과 같은 보살들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경전을 읽어보면 이분들은 이미 부처를 이루셨거나 곧 부처를 이루실 분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좀더 친근하게 법을 설하고 좀더 신속하게 구원의 손길을 내리기 위해 부처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분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분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님을 통해서 좀더 확실하게 구원의 보장을 받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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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의 번뇌와 시름

관세음 명호에 거두어지리

아이고, 관세음보살.
어떤 거사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분에게는 좀 특이한 버릇이 있지요.
사람을 만나 대화하다 울화가 치밀거나 속 터지는 일을 당하면 언제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아이고, 관세음보살…”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기막힌 일을 당하였을 때 “오우 마이 갓”을 외치듯 이 분은 “아이고, 관세음보살…” 이러면서 포옥 한숨을 내쉽니다.

60을 바라보는 점잖은 거사님의 그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가 나도 흉내를 내어보았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어떤 속상한 일이 내게 벌어졌는데 그 일이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일을 대하는 내 마음이 편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십시오. 속으로만 관세음보살을 외칠 것이 아니라 “아이고, 관세음보살…”이렇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어서 이름 불러 보십시오.
대체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성분이 담겨 있기에 이런 특효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은 이름에 불과한 것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부처님은 숱한 경 속에서 “명자(名字)에 집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에는 어떤 신비한 주술이라도 담겨있는지 그 이름 하나만으로 어지럽던 내 마음이 맑은 아침이슬처럼 청명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이름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름을 알아보아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무진의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드러내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합니까?”
무진의(無盡意)라는 이름의 보살이 부처님께 여쭙는 내용입니다. 온 몸과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는 스승님을 향해 지극한 예의를 갖추는 폼새가 참 잘 그려지고 있지요? 인도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부처님을 향해 질문을 던질 때면 바로 이런 격식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합장한 무진의 보살은 지금 관세음이라는 이름이 지닌 성분이 궁금해졌나봅니다.

관세음(觀世音)…
이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은 여간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먼저 세음(世音)이란 말은 세상의 소리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관(觀)이란 글자는 다들 아시다시피 보다, 관찰하다란 뜻입니다. 즉 관세음(觀世音)이란 말은 ‘세상의 소리들을 관찰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세음이란 이름을 산스크리트어로 돌아가서 분석해보면 두 가지의 풀이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관세음은 아왈로키테슈와라(avalokitevara)를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한 말입니다. 산스크리트어가 거의 다 그렇듯이 아왈로키테슈와라(avalokitevara)는 avalokita와 vara로 나눌 수 있습니다. 또는 avalokita와 svara로 나뉜다고도 합니다.

전자로 나눌 경우는 ‘내려다본 님[主]’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고, 후자로 나눌 경우는 ‘소리를 내려다보다’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구마라집 스님은 후자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마라집 스님이 번역한 좥보문품좦이 세상에 널리 읽혀짐에 따라 역사상 많은 주석서에서는 스님의 풀이를 받아들여서 ‘세상의 소리를 살펴보는 보살’이라는 의미로 관세음을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점은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굳이 ‘소리를 본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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