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의와 믿음의 차이
오늘은 삼귀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삼귀의는 잘 아시다시피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자신의 맹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모든 의식과 법회는 이같은 삼귀의(三歸依)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왜 삼귀의를 하는 것일까요? 삼귀의는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 짓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의 대상이 신과 신의 아들인 예수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서는 귀의의 대상이 불법승 삼보입니다. 삼귀의는 이렇게 불교의 종교적 입장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과 귀의이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을 보면‘믿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믿는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들은 먼저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상주불변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예수가 신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면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같은 기독교의 믿음은 믿고 있는 대상이 실재하는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신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할 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서양의 철학자 니체는 19세기 말에“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신이 살고 있다가 늙거나 병들어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20세기를 맞이하는 인류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양에서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고, 예수가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을 의심없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상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의해 발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임이 밝혀지자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과학과는 무관하게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은 항상 믿음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으면 기독교는 공허한 종교가 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이렇게 맹목적이며,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불교인들도 불교를 믿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듯이 불교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믿는 것이 되면 불교와 기독교는 차이가 없게 됩니다. 신을 믿듯이 부처님을 믿고, [성경]을 믿듯이 불경을 믿고, 예수를 믿듯이 관세음보살을 믿는다면,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불교를 믿는다고 하지 않고 불교를 ‘공부한다’고 말했습니다. 불교에도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불교는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의 종교입니다.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 그 가르침의 의미를 잘 이해하여,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그와 같은 가르침을 펴신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불교를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불교에 귀의했다’고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귀의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귀의란 범어 namo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namo를 음사한 것이 '나무' 입니다. 범어 namo의 원뜻은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할 때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아미타불을 신을 믿듯이 믿는다, 관세음보살을 예수 믿듯이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존경한다. 관세음보살을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귀의, 즉‘돌아가서 의지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 귀의(歸依)와 존경은 의미가 다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번역이야 말로‘나무’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옳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이것이 옳다’혹은‘저것은 그르다‘와 같이 말할 때 옳다는 것은 참되다, 거짓이 아니다, 진실이다, 진리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이 아니고, 참되고, 진실된 진리에 대하여 우리는 존경의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진리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진리는 모든 존재의 존재원리이므로 모든 것은 진리에 따릅니다. 착한 일을 하면 행복해지고, 악한 일을 하면 불행해지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도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행복은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이루어지는 진리를 알아 이 진리에 순응하여 살아갈 때 얻어집니다.
아무리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해도 자신도 모르게 불행을 가져오는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부처님이 성취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준 행복이 진리에 일치하는,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부처님을 존경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우리가 행복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존경한다는 것은 우러러 받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러러 받드는 것은 상하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 신자는 신이나 예수를 우러러 받듭니다. 이러한 기독교 신자는 결코 신이나 예수가 될 수 없습니다.
신은 영원히 인간의 주인이고, 인간은 신의 영원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존경하는 것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어린이가 에디슨을 존경한다는 것은“나도 자라서 에디슨과 같은 훌륭한 발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존경하는 마음을 변치않고 지속하면서 에디슨을 본받으면, 그는 자라서 에디슨과 같은 훌륭한 발명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namo는 이런 의미의 존경입니다.
어제의 강좌에서 이야기했듯이 부처님은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나 지고한 행복, 즉 열반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 다시 말해서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사는 분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진리를 알아서 그 진리에 의지하여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namo는‘귀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이치에 맞습니다. 그리고‘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은 “나는 아미타불을 존경합니다, 아미타불께서 48원을 세워 온 중생이 행복을 누리는 극락세계를 성취하셨듯이 나도 큰 원을 세워 모든 중생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자신의 결의를 다지는 것입니다.
‘귀의’가 존경하고 본받아 그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법과 승에 귀의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불법승 삼보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불. 법. 승을 왜 세가지 보물이라고 하는지 부터 이야기 해 봅시다. 전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언어는 외부의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표현합니다. 보물이라는 말도 밖에 실재하는 보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물은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아난 존자와 길을 가다가 길가에 진귀한 보석이 가득 담긴 보석상자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했습니다. “아난아, 저기 무서운 독사가 있는 것이 보이느냐?”아난이 대답했습니다.“예, 보고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무서운 독사이옵니다.”이 이야기를 길을 가던 나그네가 들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얼마나 무서운 독사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지나가신 후에 그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것은 독사가 아니라 보석상자인 것을 보고서, 부처님의 말씀을 의아히 여기며 남이 볼세라 주어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보석상자는 그 나라의 왕이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왕은 소중히 여기던 보석을 잃어버리고 백방으로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나그네에게 보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나그네를 잡아다가 가두어 놓고 온갖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나그네는 비로소 부처님이 보석상자를 무서운 독사라고 한 까닭을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무엇이 진정한 보물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물로 보는 것을 부처님은 독사와 같이 위험한 것으로 보고 있고 부처님께서 보물로 보는 것을 우리는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보석과 같은 재물을 보물로 생각하는 것은 재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재물은 우리를 속박할 뿐이어서 행복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모든 재앙의 근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난할 때는 의가 좋던 형제가 부자가 되면 재물 때문에 서로 다투고, 친구나 친지와 불화하는 것도 대부분은 재물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방 거사라는 분은“세상 사람들은 진귀한 보배를 귀히 여기지만 나는 한 찰나의 고요한 마음을 귀중하게 여긴다. 금은 사람의 마음을 흩트러 놓지만 고요한 마음은 진여의 자성을 본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보물을 보지 못하고 재앙의 근원을 보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고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인 줄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가장 훌륭한 보물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불. 법. 승 삼보입니다.
흔히들 불법승 삼보를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불경과 출가한 스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떤 불자 한분이 어는 절에서 스님과 대화를 하다가 스님이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자 함께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이 나이가 자신보다 20년 이상 연상인 그 불자에게 당신은 불교신도이면서 삼보도 공경할 줄 모르느냐고 꾸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불자가 스님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스님은 불자의 공경을 받을 수 있는 행실을 갖추어야 합니다. 에디슨을 존경하는 것은 그 사람이 에디슨이어서가 아니라 훌륭한 발명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승보인것은 부처님 법에 출가하여 훌륭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화내지 말라 했는데 먼저 화를 내고서 상대가 따라서 화를 낸다고 하여“나는 삼보니까 화를 내도 좋지만 너는 신도니까 스님에게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만, 이 사건은 삼보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삼보는 물론 부처님과 불경과 스님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니까 보물이고, 불경이니까 보물이고, 스님이니까 보물인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불경, 스님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아 열반을 성취했을 때. 깨달음의 길을 바르게 알려주고 있을 때, 깨달음의 길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을 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사구게에서 말씀하시기를,“범소유상(凡所有相)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하였습니다. 즉“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이와 같이 밖에 보이는 모든 현상이 허망하여 참된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삼보를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부처님, 불경, 스님으로 보고 있다면 우리는 삼보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삼보는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불교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오늘 하루에 모두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적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다 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마치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삼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