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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듣기 - 법보 (法寶) / 이중표

by 가릉빙가 2009. 3. 10.

 

 

참 나로 돌아가는 길, 법보(法寶)

전 시간까지는 불보는 어떤 것이며, 불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부터는 법보란 무엇이며, 법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르 f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법보라고 하면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하고 있는 불경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불경은 종이로 된 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경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다. 펼쳐보면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대광명을 내고 있다. 觀自在普薩 行深般夜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度 一切苦腋 불경은 밖에 있는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 모습, 즉 본래 청정한, 온갖 공덕을 구족한 우리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지혜와 자비의대광명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보와 법보는 근본적으로는 다름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경은 “우리의 참 모습이 왜 부처인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불경은 우리에게 부처 되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법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우리가 부처 되는 길로 돌아가 그 길에 의지하여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불경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크게 네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 곧 불경의 내용입니다. 먼저 고성제는 중생들 삶의 실상입니다. 중생들은 무명과 번뇌 속에서 생사의 괴로운 중생계를 윤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자신들이 이런 괴로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순간순간의 쾌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첫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생사의 우물 속에서 나무 뿌리와 같은 수명에 의지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를 외면한 채 꿀 방울과 같은 감각적 쾌락을 탐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먼저 우리에게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집성제는 중생들의 괴로운 현실이 존재하게 된 원인과 그 원인에서 생사윤회가 전개되는 원리입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가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교리라고 알고 있는 것은 이 집성제에 해당됩니다. 멸성제는 생사의 괴로운 현실의 원인을 알아, 그 원인을 제거할 때 나타나는 생사가 없는 본래의 세계, 즉 열반을 의미합니다. 도성제는 열반을 얻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수행을 의미합니다. 팔정도. 육바라밀. 사념처 등이 이 도성제에 해당됩니다.

 

이와 같은 사성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나타난다는 진리입니다. 괴로운 중생들의 세계는 무명과 탐욕이 있을 때 나타나고, 생사가 없는 열반의 세계는 수행을 통해 무명과 탐욕을 없애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같은 연기법을 깨닫고 무명과 탐욕을 없애는 수행을 한 결과 열반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법을 본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는 바로 이와 같은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법보란 한마디로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연기법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함으로써 법보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연기법은 이 세상의 존재원리입니다. 인류는 긴 역사를 통해 이 세상의 존재원리를 알아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는 많은 종교와 철학이 나타났습니다. 세상의 종교와 철학은 나름대로 이 세상의 존재우너리를 밝힌 것입니다. 무수한 종교와 철학이 나름의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크게 나누어보면 네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이 세상은 조물주와 같은 신이 창조했다는 사상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여서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유물론과 과학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정신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이 정신이 지닌 원리에 따라 이 세상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상입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관념론이 이것인데, 헤겔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관념론 철학은 언뜻 보기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는 불교의 입장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크게 다릅니다. 이점은 우리가 불교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면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넷째는 세상에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입니다. 잘 살펴 보면 이들 사상에는 모순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들 사상을 세 가지 외도, 즉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세 가지 사상이라고 규정짓고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첫째로 조물주가 이 세상을 만들어 우리의 인생과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같은 사상을 ‘존우화작론’이라고 하는데 기독교가 여기에 속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신(神)은 세상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천국으로 보내 주어야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같아도 실은 신의 뜻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도 합니다. 또 이 세상은 신의 계획에 의애 종말과 심판의 날이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요즈음 휴거 소동이 일어난 것도 다 이 같은 기독교의 교리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이같은 존우화작론은 우리의 인생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비판했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신의 뜻이고, 악한 일을 하는 것도 신의 뜻이라면, 착한 일을 한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을 비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신의 의도에 따라 한 일이므로 우리는 사람을 죽이고도 내가 죽였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광신자들은 우리의 소중한 불교문화재를 파손하기도 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탄이라고 욕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신의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은 신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은 종교나 사상은 우리의 도덕적 삶을 파괴하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둘째는 유물론이나 과학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또 관념론과 같은 철학도 여기에 속합니다. 유물론이나 과학에 의하면 이 세상은 원자와 같이 불멸하는 실체들이 인과법칙의 지배 아래서 기계적으로 변화한다고 합니다. 몇 해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세계적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팅이라는 사람이 쓴 [시간은 항상 미래로 흐르는가] 라는 책을 보니, 이 우주는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이 우주는 원자보다도 작은 먼지였다고 합니다. 이 먼지가 폭발을 일으켜 계속 팽창하면서 지금과 같은 우주가 되었답니다. 지금도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소위 우주는 큰 폭발에 의해 생겼다는 ‘빅뱅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 우주가 끊임없이 팽창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 팽창하다가 멈출 것인가, 어느 한계에 오면 다시 수축할 것인가 하는 것은 최초의 폭발 당시에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만약 처음 폭발할 당시에 폭박력이 너무 커서 인력을 능가했다면 우주는 계속 팽창할 것이고, 인력과 폭발력의 크기가 같다면 폭발력이 인력보다 작았다면, 팽창하다가 인력 때문에 다시 수축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결정된 것은 우주의 팽창한계뿐이 아닙니다. 우주 속에 있는 물질들도 그것이 어떤 모습을 지닐 것인지 이때 결정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어떤 조건 아래서는 필연적으로 어떤 상태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최초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연쇄적으로 다음의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이 세상의 생명체도 물질의 필연적인 변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결과로 나온 것이 됩니다. 또 그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도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의 작용에 의한 것이므로, 우리 인간의 행동도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뇌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필연적인 작용의 결과라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론은 우주의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헤겔과 같은 사람이 주장하는 관념론은 절대이성이라는 정신적 실체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원리에 따라 자기발전을 하는 과정에서 세계와 인간이 나온다고 봅니다. 즉 이 세상과 인간의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결정론이 되고 맙니다. 또 하나, 우리의 인생은 숙명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숙명론도 결정론에 속합니다. 점쟁이들은 우리의 미래를 점칩니다. 누구나 타고난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윌의 운명이 숙세(宿世)에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결정론을 숙작인론(宿作因論)이라고 부르는데, 부처님은 이것도 존우화작론(尊佑化作論)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이라면,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상에서 어떻게 우리는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성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세상 만사가 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한다고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한다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착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이런 것은 생각할 것이 없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아무 짓이든 해서 이익만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요즈음과 같이 종교와 사상이 혼란한 시대에 이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생각을 “원인도 없고, 인연도 없다”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 이라고 부르는데, 부처님은 이것도 도덕을 파괴하는 위험한 생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깨달았다는 연기법은 어떤 것일까요? 연기법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시간에 계속해서 다룰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연기법은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없어진다는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인연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업입니다. 우리는 “당신과 나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때 인연이란 전생에 내가 당신에게 했던 일과 당신이 나에게 했던 일을 의미합니다. 즉 당신과 나는 전생에 어떤 관계를 맺는 일을 한 적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같은 업이 나와 내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사상이 연기설입니다. 그렇다면 업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마음의 작용이 없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작용에 따라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업이 세상을 만든다는 연기설은 마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일체유심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은 관념론에서 말하는 실체로서의 정신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음의 본 모습은 아무런 모양이 없습니다. 마음은 업에 의해 그 성질과 모습이 정해집니다. 즉 업에 따라 항상 변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도둑질도 자주 하게 되면 마음이 도둑질을 예사로 여기게 되어 큰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놈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둑놈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업에 의해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놈에게는 도둑돔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업에 따라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나와 나의 세계가 변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좋은 나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연기법의 윤리적 측면을 이야기했습니다. 연기법은 윤리적 측면만을 이야기하는 진리가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을 밝히는 진리입니다. 오늘은 시간이 다 외었으므로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시간에 연기법에 대하여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