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참모습, 불보 (佛寶)
지난 시간에는 귀의의 의미를 알아보았고, 아울러 삼보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삼보는 무엇일까요? 먼저 불보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습니다. 내 친구 가운데 불심이 돈독한 의사가 한 사람 있습니다. 이 친구가 불교에 귀의하게 된 인연이 참 재미있습니다. 의과대학에 다닐 때 등산을 좋아했던 이 친구는 산에 갔다가 잠자리가 마땅치 않으면 절에 가서 숙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답니다.
한번은 지리산에 갔다가 화엄사에 들러 잠자리를 청하니, 그 곳의 스님께서 절에서 먹고 자려면 아침 저녁 예불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답니다. 예불에 참석하기로 약속하고 법당에서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데 함께 예불을 마치고 나오던 어떤 스님께서 이 친구에게
“학생은 누구에게 절을 했소?”
하고 묻더랍니다. 법당에 모셔놓은 불상에 절하고 나오면서 누구에게 절했느냐고 물으니 이 친구는 좀 어이가 없더랍니다. 이 스님이 불상에 절한 것을 모를 리는 없고 아마 무슨 뜻이 있나보다 싶어서,
“스님께서는 누구에게 절을 했습니까?”
라고 반문했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는 나에게 절을 했소.”하더랍니다. 그 친구는 이 이야기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서 불교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스님의 한 마디가 훌륭한 불자 한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귀의하는 불보는 불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상을 모시고 그 앞에 예불이나 법회를 봉행하는 일이 잘못 된 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불상은 우리가 귀의하는 부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상을 보면서 그 불상이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 불상은 돌이나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미를 바르게 알고 보면 불상은 그대로 진정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부처님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불상에 예불을 드린다면, 이것은 살아 있는 부처님에게 예불 드리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선 이천 오백여 년 전 인도의 카필라성에서 수도다나왕의 태자로 탄생하여 정각을 성취하신 석가모니부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은 너무 심오하고 방대해서 팔만대장경의 말씀으로도 그 내용의 일부분조차 다 이야기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단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우리 모두의 참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 우리는 모두가 부처님이더라는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인 줄을 모르고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알고 있는 것뿐이죠. 석가 족의 왕자 싯달타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은 우리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생사의 고해를 윤회하는, 유한하고 무능하고 무지하고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같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서 이렇게 힘없고 가련한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싯달타는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현실이 우리의 인생이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죽게 되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눈앞의 순간적인 쾌락에 묻혀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싯달타는 자신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얼른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과연 죽어 가는 우리의 인생이 극복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인지, 아니면 생사를 벗어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이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죽음에 도전한 것입니다. 6년 동안의 갖은 고행과 명상 끝에 그는 태어남과 죽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음 때문에 태어나서 죽는 것으로 잘못 알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부처님께서 깨달았다는 십이연기법입니다. 십이연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다만 십이연기법이란 태어나 죽어가는 인생이‘참나’를 모르는 어리석은 무명에서 비롯된 환상임을 밝히는 교리라는 것만 알아두도록 합시다. 싯달타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결코 태어나서 죽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 생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삼보 가운데 불보는 이렇게 본래 생사가 없는 우리의 참 모습을 의미합니다. 생사가 없는 참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러니까 우리가‘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과연 생멸이 없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먼저 몸, 즉 육신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때도 이 몸이 태어난 것이고, 죽었다고 할 때도 이 몸이 죽은 것입니다. 몸은 이렇게 생멸이 있으므로‘참 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참 나 일까요? 마음은 쉴 사이 없이 생겼다가 사라집니다. 따라서 마음을 생사가 없는 참 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참 나가 아닌 걸을 참 나인 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생멸에서 자신의 생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나는 모두가 거짓된 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거짓된 나에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귀의불, 즉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이렇게 거짓된 나에 의지해 살아가는 삶에[서 참 나로 돌아가 참 나에 의지해 살아가겠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의 교리와 수행은 결국“부처가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참 나가 어떤 것이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이란 바로 참 나를 함께 찾아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참 나가 무엇인가를 알려 하지 마시고, 오늘은“부처님은 참 나를 의미 한다”는 정도만 알아둡시다. 그리고 참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나와는 같지 않다는 사실만 알아둡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사는 뜬 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태어난다는 것은 한 조각의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의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로다. 生也一片浮雲起요 死也一片浮雲減이라 맑고 푸른 하늘에 한 조각의 구름이 생겨서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해서 푸른 하늘이 생기거나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구름이“이것이 나다”라고 생각한다면, 구름은“나는 생겨서 떠다니다가 죽는 존재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푸른 하늘이 본 모습 입니까?
싯달타는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한 것들이 구름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생겨서 사라지는 푸른 하늘은 생멸이 없듯이 허망하고 거짓된 나가 사라지면, 바로 그것이 생사가 없는 참 나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싯달타는 이렇게 생사가 없는 나의 참 모습을 깨닫고 참 나에 의지해 살아감으로써 부처가 된 것입니다. 참 나, 즉 부처란 이렇게 생사로부터 해탈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우리가 불보에 귀의하는 것은 우리도 부처님처럼 생사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해탈이라는 말은 너무 신비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만 요즈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바꾸면 자유입니다.
‘자유’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자유일까요? 자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등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속된 상태에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업기 위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민주주의라는 이념 아래 실현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참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는‘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언론의 자유이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상의 자유이며, 자기 마음대로 종교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종교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하고, 너는 너의 마음대로 해야 우리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는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남의 마음에 맞지 않을 때는 서로 간에 갈등과 투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결국 누군가의 자유는 구속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옛날에는 가정에 어른이 있어서 어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민주화가 된 오늘의 가정에는 어른이 없어졌습니다. 누구나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집안에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 뜻대로 하고 싶고, 아들은 아들 뜻대로 하고싶고, 어머니는 어머니 뜻대로 하고 싶고, 딸은 딸 뜻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 식구도 날이 갈수록 남처럼 되어갑니다. 옛날에는 한 가족은 한 몸처럼 느끼면 살았습니다. 동생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누나가 공장에 다니며 희생을 하면서도 동생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불만을 갖기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동생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한국전쟁 때에는 형이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군대에 가면 죽을 것이 뻔한데도, 형을 대신해서 군대에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집안에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누구나 마음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집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던 옛날 보다 요즈음의 가정에서 가출하는 청소년이 더 많은 것을 보더라도 가정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자유는 예전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출하는 이유를 보더라도 옛날에는 집안 형편이 어렵기 때문에 가출하여 성공해서 집에 돌아가 집안을 일으키려는 생각에서 가출했는데 요즈음은 집안 식구의 간섭이 싫어서 가출하고, 성공한다 해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식구들이 귀찮고 싫어진 것입니다. 자유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개인주의가 되어 모두가 남이 됩니다. 형제간도 남이 되고, 부모와 자식의 사이도 남이 됩니다. 부부도 남입니다. 모두가 남이 되다 보니 정도 사라지고 오직 커지는 것은 개인적이고 감각적인 욕망뿐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의 사회는 개인적인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쾌락으로 가득 차버렸습니다. 왜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우리는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유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자유가 나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면, 바른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나’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를‘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오늘날과 같은 사회병리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눈. 코. 귀. 혀.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눈은 보기 좋은 것을 원하고, 코는 좋은 냄새를 탐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혀는 맛있는 것을, 몸은 감촉이 좋은 것을 탐합니다.
그리고 이 눈. 코. 귀. 혀. 몸에 의해 지배되는 마음은 이렇게 몸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생각으로 움직입니다. 그 마음이 진정한 자기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를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병든 사회, 오염된 환경을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병리를 척결하고 공해에 오염된 환경을 되살려, 정이 넘치고 깨끗한 환경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참 나를 찾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은 이렇게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참 나를 발견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