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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교]/☞..불교강좌

BBS 불교방송 듣기 - 불교의 현대적 이해 / 이중표

by 가릉빙가 2009. 3. 10.

 

 

 

이 강좌의 제목은‘불교의 현대적 이해’입니다. 불교는 보편적 진리를 설파한 종교이므로 지역과 시대를 초월합니다. 따라서 불교의 진리가 지역에 따라 달라지거나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나 사고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 사람과 한국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고대의 언어와 현대의 언어가 다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사고방식과 언어의 차이일 것입니다. 아마 부처님이 설법하셨을 때, 그 설법을 듣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고대 인도에서 이루어진 불경을 보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로 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불경이 알 수 없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사용하지 않는 말로 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바꾸어 놓으면 매우 명쾌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나는 불교의 교리를 구성하는 불교용어를 나의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바꾸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사용하는 말로 바꾸었을 때 드러나는 불교의 교리를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려 합니다. 교리강좌의 제목을‘불교의 현대적 이해’라고 정한 까닭은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용어의 해석으로 불교가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어에 대한 부처님의 생각은 매우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사실을 지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책상’이라는 말은 책상이라는 외부의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말은 외부에 실재하는 객관적인 사물로서의 책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책을 놓고 볼 수 있는 사물에 대하여 우리가 붙여 놓은 이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책이 없는 사회에서는 책상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고,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책상에 관한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몇 해 전에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부시맨은 아프리카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의 이름입니다. 어느 날 부시맨이 사는 곳에 하늘에서 콜라 병이 떨어졌습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가던 어떤 사람이 콜라를 마시고 병을 던져 버린 것입니다. 부시맨은 비행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콜라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하늘을 나는 큰 새가 알 수 없는 것을 자기들에게 주고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이것이 무엇일까?”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콜라 병은 어디에 사용하는 것인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우연히 감자를 절구에 넣어 콜라 병으로 찧어보니 감자가 잘 으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콜라병이 절구공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매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콜라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시맨은 절구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것을 보고 웃었습니다. 부시맨은 콜라 병 모양의 절구공이가 있는데 여기에 우리가 콜라르 넣어 마신다면 이것을 보고 이번에는 부시맨이 웃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언어가 객관적 사물을 지시한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신념 때문입니다. 사실 언어는 객관적인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생각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책을 놓고 보려는 의도가 있으면 책상이지만, 같은 상이라도 밥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로 보면 밥상이 됩니다.

 

콜라를 넣어 마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 콜라 병이 되고, 절구공이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보면 절구공이가 됩니다. 따라서 콜라 병이라는 말은 콜라 병이라는 객관적인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콜라를 넣어 마시려는 의도가 있냐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는 실재하는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이것은 책상이라”라고 하는 말은“이것은 우리가 책을 놓고 보려는 의도가 있을때의 의도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물건이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그것은 마치 강을 건네주는 뗏목과 같은 것입니다. 뗏목이 강을 건네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듯이, 언어는 말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전달해 주는 수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같은 언어의 본질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벌유경(筏喩經)]에서“나의 말은 저 뗏목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이 사용하신 언어는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부처님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알 때 우리는 불교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목적으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셨을까요?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며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며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위해서는 부처님이 출가하신 목적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카필라성의 태자로 태어난 싯달타는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부귀영화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싯달타는 이 세상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온통 괴로움 뿐이라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나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즐거움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높은 지위를 차지하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때로는 싸우고, 심하면 남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의 신생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병이 없다고 해서, 가난하지 않고 부자라고 해서,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캐어나는 순간부터 괴로움의 바다 속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이 이야기는 부처님이 사위국의 왕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놀다가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겨 달아나는데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그 우물 옆에는 큰 나무가 있고, 우물 속으로 뿌리가 하나 나 있었습니다. 그는 곧 나무뿌리를 타고 내려가 우물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 우물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어서 그를 물려고 하였고, 나무뿌리를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물 밑에는 독 있는 용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용이 몹시 두려웠고 나무뿌리가 끊어질까 적정이었습니다. 한편 나무에는 벌통이 달려 있어서 벌꿀이 다섯 방울씩 그의 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 사람을 쏘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들에서는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마치고 부처님은 왕에게 물었습니다.“대왕이여, 이 사람이 벌꿀의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대답했습니다.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어떻게 그 조그마한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광야는 무명의 어두운 인생이요, 사람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이라. 사나운 코끼리는 무상함의 비유이고, 몸을 숨긴 우물은 생사의 비유라네. 나무의 뿌리는 수명의 비유이고, 두 마리의 쥐는 낮과 밤이라. 네 마리의 독사는 지. 수. 화. 풍 사대이니, 수명이 다하면 독사에게 먹히리라. 떨어지는 꿀 방울은 오욕락이요, 아프게 쏘는 벌은 그릇된 생각이라. 들판에 이는 불은 늙어가고 병드는 일, 우물 밑의 독한 용은 죽음으라네.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여 생사의 우물 속을 싫어하나니. 오욕락을 탐하여 즐기지 않아야 비로소 우물을 벗어난다네.

 

죽음의 왕에게 쫓기면서도 무명의 바다에 편한 듯이 지내는가.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려면 소리와 빛깔을 좇지 말지니. 우리는 무상의 코끼리에 쫓기어 생사의 우물속에 빠져 있습니다. 나무 뿌리와 같은 수명줄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으나 세월이라는 쥐가 하루하루 갉아먹고 있어서 수명이 다하면 네 마리의 독사에게 먹히고 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괴로움은 바로 이와 같은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것을 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물 속의 사람이 입에 떨어지는 꿀 방울을 즐기듯이 오욕락, 즉 감각적 쾌락을 즐기면서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우물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꿀 방울을 많이 얻을 생각만 합니다. 중생들에게 행복은 꿀과 같은 오욕락을 많이 얻는 것이고, 불행은 오욕락이 적은 것입니다. 중생의 생각은 바른 생각일까요? 부처님은 이러한 중생의 생각을 그릇된 생각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고통이 가득한 우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들판에 일어난 불처럼 두려운 늙음과 병고에 휩싸여 있고, 죽음의 용이 벌린 입 위에서 끊어져 가는 수명 줄에 의지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남이 얻은 꿀이 많다고 부러워하고, 내가 얻은 꿀이 적다고 괴로워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우물 속이 온통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의 출발점은 괴로움의 깨달음입니다. 괴로움을 깨닫고,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여 이것을 없앰으로써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싯달타는 카필라성의 태자로 태어나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죽음을 피아여 잠시 숨어 있는 생사의 우물 속에서는 어떤 것도 행복일 수 없음을 깨닫고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고자 출가하여 생사를 벗어나 열반을 성취했던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생사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가 있음을 믿고, 그 세계로 가는 길이 있으며 그 길을 가서 열반을 성취한 부처님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이 있을 때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생을 열반을 향하도록 전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포기한 채 하루하루 순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은 불교를 두고 삶을 포기하는 염세적인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죽어 가면서 죽음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인생을 포기한 것입니까, 아니면 죽음을 벗어나고자 헛된 욕망을 버리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이 인생을 포기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실상을 자각하여 불교를 믿고 실천하는 것은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소중한 우리의 인생을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로 전환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불교의 목적을 알아야 부료를 바르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이 어떠한가를 밝히고 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밝히며, 그 원인을 없애는 방법을 실천하여,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을 증득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같은 불교의 목적을 바르게 알아 열반을 성취하려는 의도에서 불교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