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나의 발견과 진정한 자유
전 시간에는 부처님은 참 나를 깨달은 사람이고, 참 나를 깨달은 사람은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우리가 알고 행하고 있는 자유는 참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자유이므로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따라서 온갖 사회병리와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참 나를 깨달아 성취하는 자유는 어떤 것이며, 이 자유는 어떻게 사회병리를 치유하고 우리의 행복을 성취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그렇다면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었을 때 느끼는 충족감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같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작용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얻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이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을 때를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자유란 행복을 얻기 위한 마음의 작용이 아무런 방해를 받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속이란 자기의 행복을 위한 마음의 작용이 방해를 받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참 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 나가 아닌 이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산다고 하면서도 행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 나를 발견하고, 그것이 나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그 참 나의 행복을 위해 작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 나에 의지하여 일어난 마음을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를 살펴봅시다. [반야심경]은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하여 행복을 얻는 길을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이 경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갔을 때 오온이 모두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다.
반야의 지혜로 오온이 비었음을 보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반야심경]은 오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온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입니다. 대부분의 불교교리 소개서에서 오온은 물질과 정신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색(色)은 물질을 의미하고 수, 상, 행, 식(受, 想, 行, 識)은 정신작용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반야심경]은 물질과 정신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허공처럼 텅 비어 있음을 보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허공처럼 텅 비어 보이고, 모든 정신작용이 사라지면 괴로움도 없을 것이고, 즐거움도 없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이렇게 텅 비어 버리면 아무도 없는 허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허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허무한 세계가 반야바라밀다의 세계 일까요?
[잡아함 306경]을 보면 오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색을 보면 무엇인가를 보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보는 마음이 있을 때 무엇인가가 보이며, 보이면 그것에 대하여 느낌이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수(受 느낌), 상(想 생각), 행(行 어떻게 하려는 생각), 식(識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마음)이다. 보는 눈과 이들 네가지를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들 오온에서 사람이란 생각을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내가 귀로 소리를 듣고....”
이 경전에 의하면 오온이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어떤 사물을 보면 “ 내가 본다”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나는 보는 나입니다. 한편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 “내가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나는 느끼는 나입니다. 이밖에도 나는 생각하는 나, 행동하는 나, 의식하는 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식하는 나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감정으로 느끼고, 이성으로 생각하고, 의지로 행동하고, 의식으로 인식한다고 말합니다. 오온이란 이렇게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섯가지 우리의 생각이지 물질과 정신이라는 어떤 객관적인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모여서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허망한 생각으로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다섯 가지 망상을 부처님께서 오온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같은 다섯가지의 나는 지혜롭게 깊이 생각해 보면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식하지 않을 때는 나라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것을 의식합니다. 따라서 다섯가지 생각은 무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경에서는 “오온은 무상하다”라고 말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그 속에 어떤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불경에서는 “오온은 무아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온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반야심경]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관자재보살은 지혜롭게 깊이 생각하여,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해 왔던 몸. 감정. 이성. 의지. 의식 등이 모두 인연에 따라서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생각일 뿐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나로 인해서 생겨 난 모든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우리의 거짓된 나가 허망한 망상임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참 나의 구체적인 모습은 시원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경 속에 우리의 참 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송 가운데 “만리무운 만리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만 리의 하늘에 구름이 없어지면 수만 리의 하늘이 그대로 하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떠나 따로 구름이 없고, 구름을 떠나 따로 하늘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허망한 생각을 지워버리면 모든 것이 그대로 우리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색증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몸이 내가 아니라고 해서 몸을 없애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이 내가 아니라고 해서 이들을 없애버린다면 남는 것은 허무일 뿐입니다. 문제는 몸이나 느낌 등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이들을 잘못 보는 데에 있습니다. 오온의 실상을 알고 보면 오온이 곧 그대로 참 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온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요? 우선 색(色), 즉 우리의 몸을 잘 살펴 봅시다.
우리는 부모에게 몸을 받고 태어나 그 몸으로 평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이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는 이 몸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죽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몸을 잘 관찰해 보면, 태어날 때의 몸과 죽을 때의 몸은 동일한 몸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의 몸은 태어난 순간부터 변화합니다. 어릴 때의 사진과 커서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렸을 때의 나와 커서의 나를 동일한 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동일하지 않은 몸을 동일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온으로서의 색입니다. 즉 오온으로서의 색은 색의 실상이 아니라 우리가 꾸며놓고 집착하고 있는 허망한 생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색, 즉 몸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색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색에 대해 가지고 있는 허망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사념처 가운데 신념처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몸에 대한 관찰에 집중한다느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잘 관찰하면 몸은 먹는 것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잘 먹으면 살이 찌고 못 먹으면 몸이 마릅니다. 또 먹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하고 사라져갑니다. 따라서 몸은 음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음식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음식과 몸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음식을 먹어 내 몸에 들어오면 음식은 우리의 몸이 되고, 소화가 되어 배설하고 나면 배설물은 내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배설물이 논밭에 뿌려져 쌀이 되고 과일이 되어 우리 몸에 들어오면 다시 내 몸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 몸과 음식물과 배설물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음식에 대하여 살펴 봅시다. 음식은 땅이 있어야 생길 수 있고, 나무. 공기. 태양. 물 등이 있어야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음식은 나무. 공기. 태양. 물 등과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곧 나무이며, 공기이며, 태양이며,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의 몸 아닌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내 몸은 태어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없이 인연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몸은 무상하여 상주불변하는 실체는 없지만 인연 따라 항상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몸은 무상하여 상주불변하는 실체는 없지만 인연 따라 항상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상하여 실체가 없는 모습을 공이라고 부르고, 인연 따라 나타나는 모습을 색(色)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내 몸의 참 모습은 ‘색즉시공’이고 ‘공증시색’인 것입니다.
수. 상. 행. 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나를 이렇게 알았다면, 참 나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흙이나 공기가 내 몸이 아니라고 오염시키고, 흐르는 강물이 내 몸이 아니라고 강물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흙이나 공기나 물이 오염되면 우리의 몸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의 몸을 위해서 내 몸을 보살피듯이 환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보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남과 내가 둘이 아니라 모두가 참 나라고 생각하면 나를 위해 남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남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죽음의 길로 가면서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대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자유가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니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는 그렇게 살 때 행복을 느끼도록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해탈을 구족해 있는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이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리석고 허망한 생각, 즉 무명과 번뇌일 뿐입니다.
그래서 3조 승찬 스님에게 4조 도신스님이
“스님, 자비로써 저를 해탈법문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승찬 스님은
“누가 너를 묶었느냐?”
고 반문했고, 승찬 스님의 이 말씀에 도신 스님은 본래 해탈해 있는 참 모습을 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참 나를 깨달아 참 나를 위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참 나를 밝게 비추어 보는 지혜와 그 지혜에 의해 모든 중생을 한 몸으로 여기는 동체자비를 구족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이ㅡ불 양족존, 즉 지혜와 자비 공덕 두 가지를 빠짐없이 구족하신 부처님에게 귀의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자유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욕망의 노예로 만들 뿐입니다. 현대인은 이 같은 잘못된 자유의 결과로 수많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신과 남과 우리의 세계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합시다. 본래 자유롭고, 지혜와 복덕을 구족하고 있는 자신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 참 나에 의지해서 살아갑시다.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구족하신 거룩한 불상을 바라보면서, 저 모습이 나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참 모습에 지극정성 예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