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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업 닦는 이들 많으면 많을수록 사바세계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
현실에는 우리와 같은 인간 세계가 존재하는가 하면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세상도 존재합니다. 착한 일을 아주 많이 한 사람이 가게 되는 욕계의 여섯 하늘과, 참선을 부지런히 닦는 이가 차례차례 나아가는 선정의 하늘인 색계의 열여덟 하늘과 무색계의 네 하늘이 그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해도 범부에게는 서로 뺏고 빼앗기며 작은 행복에 흡족해하고 작은 슬픔에 세상이 끝난 것처럼 몸부림을 치는 사바세계이지만 선업을 닦은 이들은 온통 즐거움이 가득 찬 세계를 누리고 있으며, 수행을 많이 한 이는 숨쉬는 한 찰나가 그대로 참선의 단계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하늘의 몸으로도 나타나서 구제의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범천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범천왕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제석천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제석천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자재천(自在天)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자재천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대자재천(大自在天)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대자재천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천대장군(天大將軍)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천대장군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비사문(毘沙門)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비사문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이 가운데 범천왕은 색계 가운데 첫번째 하늘을 맡고 있는 존재이고, 대자재천은 색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제석천은 욕계의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을 다스리는 왕인데 사천왕과 33천을 거느리며 인간이 선을 행하고 있는지를 항상 살피는 천신입니다. 자재천은 욕계 여섯 하늘 중에 으뜸가는 천신입니다. 다른 이가 지은 선업을 빌어 자기의 즐거움으로 삼는데 『관음의소』의 설명에 따르면 자재천왕은 마(魔)의 세계를 부처님의 세계로 만드는 일까지도 하는 마왕(魔王)이라고 합니다.
천대장군에 대해서는 반치카라는 이름을 가진 야차대장이라는 『관음의소』의 설명과, 전륜성왕을 말한다고 하는 나카무라 하지메 사전의 또 다른 설명도 있습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똑같다고 하겠습니다. 비사문천은 절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천왕 가운데 북방을 다스리는 천신입니다. 중생들에게 재물을 주며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법문을 많이 듣는 장점을 가진 존재이지요.
소왕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소왕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장자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장자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거사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거사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관리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관리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바라문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곧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소왕(小王) 즉 작은 왕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나라의 통치자를 가리키는데 옛날 같으면 임금을 말할 것이요,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 같은 이를 말합니다. 장자(長者)는 경전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신분인데 천태대사는 ‘뛰어난 사람의 열 가지 덕’을 갖춘 사람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열 가지 덕이란 혈통이 고귀하고, 지위가 높고, 부유하고, 위엄이 있고, 지혜가 깊고, 나이가 지긋하고, 품행이 깨끗하고, 예의 바르고, 윗사람이 칭찬하고, 아랫사람이 잘 따르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관음의소』).
거사는 재물이 넉넉하고 집에 거처하며 가정과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이 많은 사람, 관리는 오늘날의 고위공무원에 해당될 것이고, 바라문은 깨끗한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인도에서 종교와 제사를 관장하던 계급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종교에 몸을 담고 있되 순수하게 홀로 수행에 정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행정을 겸하는 성직자를 뜻한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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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가 마땅히 지켜야할 것은
진리 추구와 지혜로운 침묵이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몸으로 제도할 이에게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며
비구와 비구니는 남녀 출가자, 우바새와 우바이는 남녀 재가신자로서 불교의 승가를 구성하는 네 가지 큰 부류(사부대중)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후대로 이어지는 것은 이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비구와 비구니라는 말에는 빌어먹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고 우바새와 우바이라는 말에는 가까이 모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출가한 스님은 재가불자에게 밥을 빌어서 먹는 사람이고, 재가불자는 출가한 스님을 가까이 다가가 모시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는 서로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부처님은 출가자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수행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두 가지에 힘써야 하나니 진리에 관해 말하는 것과 지혜로운 이의 침묵이니라.”(『증일아함경』 제34 칠일품)
부처님 당시 출가자는 그 어떤 생산 활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생산을 하지 않으니 소유할 것이 없게 되고 소유하지 않으니 시간이 온전히 남습니다. 하루 한 끼의 탁발을 마치면 남은 시간은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쏟아야만 했습니다.
반면 재가자인 우바새와 우바이에게는 이런 원칙이 적용하게 됩니다.
“세속에 살면서 집안을 잘 다스리고 목숨이 끝날 때까지 바른 믿음을 가지며 오계를 잘 지키기를 서원한 사람을 우바새라 한다. 우바새는 믿음을 지니고 계율을 잘 지키며 보시해야 한다. 하지만 수행자를 찾아가 법문을 듣지 않으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항상 찾아가 법문을 들어야 하며 들은 뒤에는 몸소 실천해야 하니 이것이 우바새의 바른 삶이라고 한다.”(『잡아함경』제33권)
생산과 소유를 떠난 대신 생명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수행하는 출가자.
열심히 일하여 가정과 사회를 알뜰하게 가꾸고 출가자의 수행을 도와주는 재가자.
그런데 출가자에게는 법을 설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재가자에게는 그 법을 듣고 실천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당시 출가자와 재가자들의 원칙적인 생활방식이었습니다.
물론 멀고도 오랜 인도의 풍조를 동북아시아에 자리한 21세기 한국 땅의 수행자와 재가불자에게 고스란히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유를 포기하여 자신을 비워내고 진리를 온전하게 담았을 때 출가자는 재가자의 존경과 봉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수행자의 삶을 존중하고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비추어보며 서투나마 닮아가려고 노력할 때라야 재가자는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속사정은 어떨까요? 출가한 스님들이 수행과 관련하여 대화를 하기 보다는 신자들의 가정사나 세상사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재가신자들 중에는 스님들이 들려주는 부처님 말씀에는 아예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우리 절 스님은 꿈풀이나 택일을 해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비난하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신 앞에 서서 부적을 써줄 생각은 하지 않고 보시해라, 기도해라, 경 읽으라며 성가시게 굴고 있는 저 스님, 태고의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당신의 법문에 싫증내고 있는 저 재가불자, 수행의 한 고비를 넘지 못하고 퇴전한 채 나의 옷자락을 자꾸만 끌어당기는 타락한 옛 도반이 바로 관세음보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당신과 나의 수행 정도를 가늠하고 따끔하게 인도하시고자 절 집안 도처에서 수시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 // |